어느 이른 겨울밤이었다. 두 친구와 함께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 방파제에는 파도가 제법 힘차게 밀어닥치고 있었다. 방파제의 이곳 저곳에 흰 물보라를 뿜어 올리면서 파도가 스쳐간 자리에는 잔물결이 빠르게 나부끼다가 사라지고, 다시 큰 파도에 휩쓸리곤 했다. 옷깃을 여미고 방파제의 입구에 서서 이와 같은 파도의 행진들을 바라바보고 있었던 우리들은 결국 어떤 새로운 유혹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것은 간헐적으로 밀어닥치는 파도의 사이사이를 뚫고 방파제의 끝까지 돌진했다가 되돌아오는 일이었다. 어느 친구의 입에서 먼저 이런 제안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마치 대단한 발견이라도 해낸 사람처럼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허리띠를 단단히 매고 이 위험한 게임 속에 뛰어들기로 했다
방파제의 폭은 약 7~8미터 정도였던 것 같다. 파도가 스쳐갈 때마다 얼른 한 지점을 통과하고 다시 큰 파도를 맞이하는 이런 일들이 수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만일 시간을 잘못 맞추고 뛰어들었다가는 파도에 휩쓸려서 봉변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좀 겁나는 일이어서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게 했지만. 그만큼 드릴을 맛보기에 충분했다.
우리들의 키보다도 높이 솟아오르는 파도가 힘차게 달려들어 방파제에 부서질 때마다. 바다는 무슨 거대한 짐승처럼 분노에 떨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산산이 바수어 놓고 마는 것 같은 그 우람한 포효가 우리들의 연약한 숨소리까지도 모두 흡수해버리는 듯 했다.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우린 긴장된 얼굴로 앞을 주시하면서 파도를 피해 달려 나갈 기회를 엿보곤 했다. 어려움에 처하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이 평소에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용기를 발휘하고 위기를 극복해 내듯이, 우리는 이 위험스런 게임을 곧잘 해내고 있었다. 파도를 피해서 달려 나가노라고 했지만, 그래도 남은 물거품을 뒤집어쓰기도 하고 또는 파도가 스쳐간 뒤의 방파제 위에는 잔물결이 일고 있어서 그것을 밟고 재빠르게 달려 나갈 때마다 우리는 온통 물보라를 뒤집어쓰곤 했다. 물에 빠졌다가 나온 생쥐처럼, 우리는 모두 머리에서 발끝까지 물에 젖어 있었다. 눈을 바로 뜨고 파도를 관찰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 얼굴을 닦아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두려움은 늘 따라 다니고 있었다. 만일 위치를 잘못 선정하고 서 있다가는 파도가 바로 우리들 앞으로 달려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줄곧 사방을 살피며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파도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우리들 건너편을 뛰어넘을 때에는 이젠 살았다는 듯이 이상한기성을 내지르며 쏜살같이 달리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방파제의 길이는 약1킬로 남짓했던 것 같다. 4분의 3쯤 달려 나갔을 때, 우리는 더 이상 모험을 감행할 수가 없었다. 방파제의 남은 부분은 온통 거대한 파도 속에 휩싸여 있어서, 우리가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 의지할 곳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그 지점에서 뜻하지 않은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젠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망설이고 있었을 때. 우리들 중의 한 친구가 공포에 떠는 목소리로 아- 아- 소리를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얼른 뛰어가 보았더니, 군복차림의 한사나이가 쓰러져 있었다. 몸을 흔들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아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아직 목숨이 남아있는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우리는 엉겁결에 그 사람의 손목도 잡아보고, 눈을 뒤집어 보기도 했다. 희미한 어둠속에서는 잘 분간할 수 없었지만 아직 목숨은 붙어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었다. 우리는 그래서 서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한 친구가 그 사람을 등에 업고 나머지 둘이 뒷바라지를 하면서 파도를 뚫고 나오기로 했지만, 그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축 늘어진 시체를 짊어지고 그 먼 거리를 빠져나올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두 친구가 가서 들것을 마련하고 차를 불러올 때까지 나는 이 시체를 지키기로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아무리 기다려도 친구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봐도 소름이 끼친다. 그때 내가 겪은 두려움의 기억들은 어떻게 다 설명할 수가 없다. 바다에는 온통귀신의 떼가 몰려들어서 우글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곁에 쓰러져 누운 그 낯설은 사나이까지도 벌떡 일어나서 내게 달려들 것만 같은 착각을 일으키곤 했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 나를 지켜준 힘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지금도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싶을 뿐이다. 머릿발이 뻣뻣하게 일어서는 그 공포의 바다 한가운데서 그래도 내가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기도문의 도움이 컸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제주시에는 영업용 택시가 몇 대 되지 않았다. 친구들은 차는커녕 들것도 마련하지 못한 채 빈 몸으로 돌아왔다. 그날, 우리는 그 사나이를 짊어지고 얼마나 끙끙거렸는지 모른다. 때로는 파도에 밀려 서로 부둥켜안고 뒹굴기도 하고, 숨을 헐떡거리며 그 사나이의 육체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가 다시 등에 업고 뛰기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제주도립병원은 바닷가에서 한참 멀리 덜어져 있었다. 이 병원에는 숙직 의사 한사람과 간호원 둘이 남아있었다.
의사는 회생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 우리는 목숨을 건지지 못해도 좋으니 치료를 해달라는 식의 간단한 서약서를 쓰고 의사에게 맡겼다. 한참에야 간호원으로 부터 기쁜 소식을 들었다. 의식이 조금 돌아오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것이었다. 그때 그 기쁨은 얼마나 감격적인 것이었던가. 치료비를 마련하고 우리 셋이 병원으로 다시 돌리 갔을 때는 완전히 의식을 회복하고 있었다. 우리는 응급실의 그 침대로 다가갔다. 왜 자살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는지 호기심이 가기도 했지만, 우선 그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의 호의에 대한 그 사람의 반응은 정반대로 나타났다. 그는 원망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버린 것이다. 그리고,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덧 3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도 그날 그의 표정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는 참으로 우리를 원망하고 있었는가? 그가 어떻게 느끼고 있었든 간에 나는 지금도 그 방파제의 밤을 연상할 때마다 공포의 순간들을 기억하는 한편, 어떤 조그만 기쁨을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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