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늘나라를 설명하고 알아듣게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바로 그 일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다. 수학선생님은 이치로 설명하고 자연과학은 변화의 원인결과를 캐내어 설명하고 어학은 문법으로 설명한다. 유대아인들의 랍비들은 인생을 율법으로 설명하여 인간에게 종교 교육을 하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나라에 관한 교육을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 교육방법은 세상 학문과는 달리 세상에서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그 속에 참된 진리가 담겨있는 것을 가르치는 수사법을 사용하셨다. 이것을 역설(逆說)이라고 한다. 가령 죽음은 죽음이 아니고 영원한 삶의 시작이다. 제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등. 가난한 사람이 복되고 우는 사람이 웃을 것이며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 등 예수님의 행복론은 하나의 역설적인 수사법이다. 하늘나라를 설명하는 복음서에는 역설법 뿐 아니라 풍유(諷喩)은유(隱喩)비유(譬喩)와 같은 수사법을 많이 사용한다. 비유에 대해서는 후에 설명하기로 하고 오늘은 풍유와 은유를 설명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풍유는 그리스어 메타포라라는 말의 번역으로「메타」는「넘어서」라는 뜻이고「포라」는「가져가다」라는 뜻이다. 뜻을 저 쪽으로 가지고 간다는 뜻이다. 우리말로는「전의」(轉義)라는 뜻으로 전유(轉喩)라고 해야 옳을지 모른다. 그런데 풍(諷)자는「슬며시 에둘러 타이르다」라는 뜻으로 남의 결점을 에둘러 비아냥대는 것을 우리는 풍자라고 한다. 그러나 비아냥대지 않고 교육적으로 에둘러 타이르는 것은 풍유라고 하는 것이다.
성서 해석학적인 용어에서는 풍유를 「직유」(直喩)와 구별한다. 직유는 라틴어 「시밀레」의 번역으로「A는 B와 같다」라는 표현으로 A라는 사물을 설명하는 수사법이다 풍유는 「A는 B이다」라는 표현으로 B의 속성을 A로 옮겨 A와 B를 동일한 것으로 표현한다. 그러니까 직유는 두 사물을 직접 빗대어 말하는 비유이며 성서에서 예를 들면 「파리사이파 너희들, 너희는 흰 칠한 무덤과 같다」(마태23, 27)이고 풍유는 오늘의 제목인「너희는 땅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다」와 같은 수사법이다.
직유를 윤리적이고 영성적으로 발전시키면 그리스어로 파라볼레라고 하는 비유(譬喩)이며 하느님나라를 설명할 때 복음서에서 많이 쓰인다. 풍유는 에둘러 설명하는 수사법으로 그것을 발전시킨 형태를 은유(隱喩)라고 하며 그리스어로 알레고리아라고 한다. 알레고리아는 숨겨진 다른 뜻은 빗대어 말한다는 뜻이다. 알레고리아는사도 바오로가 구약에 숨겨진 뜻을 신약의 빛으로 해석한 성서해서법이며(갈라4, 21~31) 교부들이 예수의 비유를 설명하는데 사용했다(우리나라 사전에서는 은유와 풍유를 바꾸어 번역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일꾼인 제자들의 기본적인 성격을「땅의 소금」「세상의 빛」으로 풍유했다. 소금은 음식물에 맛을 넣어주고 음식물의 부패를 방지하는 자연적 성격에서 세상에 생력을 넣어주어야 할 제자들에게 꼭 있어야 할 덕성이지만 그 맛을 남에게 주기 위하여 자기는 녹아 없어져야 하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정신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므로 소금구실을 못하는 제자는 제자도 아니며 소금역할을 못하는 제자를 다시 써보려고 해도 고칠 방도가 없다는 교훈을 예수께서는 강력히 못 박아 놓으셨다.
「짠맛을 잃은 소금」은 있을 수가 없다. 땅에 버려져 짓밟힐 쓸모없는 소금은 물에 녹아 형태가 없어졌을 때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짠맛을 잃은 소금이야기를 풍유로 든 것은 바로 제자들의 역할이 제자라는 명목에 있은 것이 아니라 짠맛을 내는 내용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어법이다.
루가복음서에서는 짠맛 잃은 소금은 땅에서 거름에도 소용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 대목은 학자들의 주석이 없어 난해한 글로 남아있다. 소금을 땅에 뿌린다는 것은 아마도 구약의 판관기에 적지를 점령하고 그 땅이 불모의 땅이라는 뜻으로 소금을 뿌렸다(9, 45)는 기사와 연계시킬 수 있을지 모르나 소금을 거름에 사용했다는 기사는 아무데도 없다. 하여튼 아무 쓸모가 없다는 강조의 뜻으로 알아들을 수밖에 없다.
제자들은 또한 세상의 빛이라야 한다. 이 세상에 혈육 강생한 하느님의 말씀은 생명이며 생명은 어두움을 비추어주는 사람들의 빛이다(요한1, 4). 이제부터는 제자들이 그 빛이 되어야 한다. 그 빛은 주위 사람들의 보호와 평안을 보장해 주며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도시와 같다. 아마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생각했을 것이다.
이제 그 예루살렘은 제자들 자신이다. 그것은 진리의 빛이며, 하느님 나라에 도통한 지혜를 말한다. 어두운 방을 밝히려고 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 버리는 미련동이는 없다. 그런데 맡겨진 사명을 않고 딴 짓을 하는 제자는 이런 미련동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들을 귀 있는 자 들으라고 하신 것이다. 역설을 사용해서 풍유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뜻을 알아들으려면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 덕성을 소금으로 간직하고 지혜를 빛을 발하면서 서로 평화를 도모하는 것은 하느님나라를 전파하는 사람들의 필수적인 품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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