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1일은 교황 요한 23세께서 단순한 교회의 복지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인류 사회의 발전을 위해 혁신적인 사건이 되길 희망했던 제2차「바티깐」공의회 개막 10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1962년 10월 11일 전 세계 각국 교회로부터 몰려온 2천5백40명의 주교 및 타교파 대표들은 교황 요한 23세의 가톨릭교회 21번째 공의회 개막 선언을 듣기 위해「성 베드로」대성전으로 줄을 지어 입장했다.
지나간 10년을 회고해 볼 때 과연 제2차「바티깐」공의회가 교회 내의 현대적 변혁에 대한 근원을 내포하고 있었는지 다소 의심스럽다. 그러나 공의회가 사고 면에 있어서와 교황청과 그 중앙행정기관들 간의 접근책에 있어 가져온 특별한 변화나 쇄신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확실히 공의회는 교황청 각 부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많은 비판들은 공의회의 영향이 그다지 대단한 것도 또 깊이 침투된 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례로 반제도주의자들은 공의회가 교황청 기구들의 인원 감소에 있어 바람직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고 항의한다. 실지로 지금 현재는 과거 10년 전보다 더욱 많은 교황청 기구들과 사무국들이 생겨났다. 즉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ㆍ평신도평의회ㆍ교황청 비그리스도교국 및 비신자 국ㆍ세계주교시노드 등은 모두가 제2차「바티깐」공의회의 부산물들이다.
교황 바오로 6세의 로마 꾸리아(교회 중앙행정기구) 쇄신 역시 공의회의 직접적인 결과 중의 하나이다. 1967년 꾸리아 쇄신을 단행함에 있어 이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교황은『꾸리아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못 박고『시대적 요청에 보다 적절히 응하기 위해』쇄신작업은 필수적이라고 밝혔다. 그리하여 꾸리아의 쇄신은 모든 중앙 행정기구들이 공의회가 희망했던 범위 내에서 최대의 성과를 거둘 수 있기 위해 각 기구는 담당분야의 일을 처리하는 데 새 규정들을 애써 실천토록 요청했다.
뿐만 아니라 공의회 이전엔 추기경들에게만 그 자격이 한정돼 있던 교황청 성성 및 그의 다른 부서들에 세계 각 지역을 대표하는 주교들이 임명되었는가 하면 교황청 요직에도 비이태리 출신 추기경 및 주교들이 대거 등장하게 됐다.
특히 현대 교회에 있어 의견과 필요성의 양자간 소통의 가능성과 이를 표현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키 위해 교황이 신설한 세계주교시노드ㆍ정의평화위원 및 평신도평의회 등과 같은 자문기관들은 종전까지의「바티깐」일방적인 노선을 지양하고 나아가서는 교황 요한 23세가 요청한「현대 적응」을 더욱 잘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 공의회가 요청한 결정권과 권위 행사의 지방 분권을 위한 노력은 각국 주교회의를 강화함으로써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더욱이 과거엔「바티깐」에서 내려졌던 결정들이 이제는 각국 주교회의에 그 권한이 양도돼 이를 통해 지방 주교들에게 동권이 부여된다.
이에 대해 꾸리아의 관리들은 꾸리아의 사업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나 영신적 지도를 하는 데 있어 큰 변화가 있었다고 말한다. 이 변화는 과거 엄격한 명령들과 특별한 지침들을 부여하는 옛 태도로부터 새롭고 보다 자유스런 봉사의 개념으로의 변화라고 말한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교황청의 한 몬시뇰은『오늘날 우리는 주교들과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을 말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을 찾고자 한다』고 말한다.
한편 제2차「바티깐」공의회의「시대적 표징들」과 더불어 자태를 드러낸 모든 교황청 기구 제도 및 인물들 중 가장 중심적이고 명확한 것은 바로 교황 바오로 6세이다.
지오반니 밧띠스따 몬띠니(교황 바오로 6세의 본명)의 교황 직위는 10년 전 1962년 10월 11일에 개막된 가톨릭교회 21번째 공의회의 혁명적 사건 속에서 싹 트고 공의회에 의해 형성되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선임자의 서거 이후 공의회 4회기 중 3기를 사회했으며 더욱 중요한 것은「공의회 후의 교회」로 불려지게 된 공의회의 가르침을 역사 속에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될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
재임 9년을 통해 교황은「세계를 향해 널리 열려진 공의회의 창문으로부터 비길 데 없는 감명을 받았는데 교황은 이를 공의회 제2회기 개막 서두에서 밝혔었다.
그러나「공의회의 창문」을 스치는 바람이 너무 차갑고 혹심한 때도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타격은 교황이 남미 주교들의 불만과 교회 내의 투쟁들에 간해 얘기할 때 교황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공의회의 창문」으로부터 솟아나는 힘과 전 세계 주교들의 성의 있는 후원을 힘입어 평화를 위한 순례와 화해를 위한 서약을 마음에 되새기며 교황으로서의 첫 발길을 서서히 내딛기 시작했다. 먼저 세계 평화를 위한 교황 바오로 6세의 노력은 선임 교황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다. 1964년「뉴욕」UN본부를 방문하여『이 땅에 또 다시 전쟁이 없기를!』호소함으로써 세계 평화를 이룩하려는 교황의 성지는 세계 방방곡곡에 울려퍼졌다. 특히 북에이레의 사태 수습을 둘러싸고 영국의 에드워드 히드 수상이 교황을 알현한 것을 비롯, 미국의 닉슨 대통령과 소련의 포드고르니 수상 및 유고의 티토 대통령이「바티깐」을 방문코 교황과 세계 평화를 위한 대화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교황은 인도ㆍ남미ㆍ아프리가 및 아시아 지역들을 두루 순방하면서 평화를 위한 노력을 몸소 실천하기도 했다.
더욱이 세계 평화를 위한 교황의 노력은 비단 외교적 방면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1967년 자의교서「제민족의 발전」을 통해 교황은「발전은 평화의 다른 말」임을 선언코 인류 공동체로서의 약소국 및 개발도상국들에 대한 세계 열강들의 의무를 재삼 환기시킨 바 있다.
그 이듬해인 1968년에는 세계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바 있는 자의교서「인간의 생명」을 발표, 인공 산아 제한에 반대하는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재천명한 바 있다. 교황 바오로 6세의 재임 9년 기간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주요 사건은 바로 교회 일치를 위한 그의 노력이었다고 하겠다. 교황으로 등극한 바로 그해 4백 년 이상의 단절을 깨고 총대주교와 3차에 걸친 대화를 가짐으로써 양교회 관계의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했으며 성공회와는 성체성사에 대한 상호 의견 일치를 보기까지 양교회 관계가 진전됐다. 또한 개신교들과도 대화의 광장을 마련하는 한편 교황 자신이「제네바」의 세계교회협의회(WCC)를 방문, 교회 일치를 위한 노력을 잠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올해로써 역사적인 제2차「바티깐」공의회 10돌을 맞았다. 옛말에「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듯이 지난 10년간 교회 안팎에는 많은 변화와 쇄신이 있었다. 그러나 공의회로 인한 이러한 변화나 쇄신은 아직 시초에 불과하며 유아기에 처해 있다. 이를 실수 없이 성공리에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전체 교회의 끊임없는 노력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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