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고 무성하던 여름이 지쳐 눕는 자리-만추로 접어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뜨락에 나가 보면 황금의 낙엽들이 수두룩히 쌓였다. 생명이 지는 조락의 종소리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고 싸늘한 바람이 가슴으로 스며든다. 이제 우리가 만물을 망각하고 또한 만물에 의하여 우리들이 잊혀지는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허무와 고독에 몸과 마음을 떨며 불면의 밤을새운다. 지는 잎새에 뿌리는 찬 빗소리는 처절한 종언을 예고하고 어둡고 긴 마혼의 계절을 전령한다.
진정 가을은 우리의 심사를 끝없는 애상과 우수에로 몰고 가는 계절이다.
추수를 끝낸 회색의 빈 벌판, 회초리처럼 남아 있는 나목의 잔 가지를 융성하고 번영하여 그 화려함과 영화가 극치에 이르렀던 한 왕국이 쓰러진다 한들 이토록 아픈 아픔이랴.
모든 것이 문을 닫고 숨는다. 허물어지고 사라진다.
지난날 우리는 한 허황한 꿈을 꾸었을까, 진실로 생면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세상 회의하고 무상함을 느낀다.
우주 가운데 하잘 것 없는 미물이 곧 인간이요, 나 자신임을 절감하며 유한한 능력과 생명을 통탄치 아니치 못한다.
하지만 형상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런 시를 썼다.
<나뭇잎이 떨어집니다.
아슬한 곳에서 내려오는 양
하늘나라 먼 정원이 시들은 양,
싫어하는 몸짓 하며 떨어집니다.
그리하여 밤이 되면 무거운 대지가
온 별들로부터 정적 속에 떨어집니다.
우리도 모두 떨어집니다.
여기 이 손도 떨어집니다.
그대여 보시라 다른 것들을, 만상이 떨어지는 것을
하지만 그 어느 한 분이 있어 이 락하를 무한히 다정하게 두 손으로 떠괴어 주고 계십니다.>
그렇다 이제 땅에서 소생한 것은 모름지기 땅으로 돌아간다. 애초에 비었던 것, 헛되이 우거졌던 것도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간다. 작별의 손짓 손짓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한 번 맑은 마음의 눈을 떠 바라본다면 천지는 그냥 비어 가는 것은 아니다.
이 계절이 아무리 비애롭고 서글프더라도 슬픔 그것만으로 끝날 것도 아니다.
태양이 기울고 어스름 황혼녘에 갈가마귀 우지짖는 처량한 순간에도 어딘가에 따사로운 불빛은 비칠 것이다.
잎새가 지는 자리, 그 아픈 자리마다 내년 봄 햇꿈의 언약이 남는다. 새 잎새 새 꽃자리를 마련하는 부푼 기대 이것이 이 조락 속에 있는 것이다.또한 이별은 다시 만남을 기약하고 오늘 사라지는 것은 내일의 소생을 뜻한다. 잘 영글은 과물이 이순히 떨어지듯 우리는 이 자연의 섭리를 머리 숙여 긍정하게 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사라져 없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이 있으랴. 어디론가 사라져 없어져 버리기 때문에 그것이 사랑스럽고 애석한 것이 아닐까.
이제는 풀벌레의 울음소리도 사라져 가는 철, 문득 한밤중에 눈 뜨면 깊이 모를 허무와 불안의 나락이 검은 입을 벌린다. 그러나 마음이여, 마음이여, 유약하지 말아라, 두려워 떨지도 말아라, 우리가 가장 슬프고 괴로울 때, 아프고 고독할 때, 항상 우리와 함께 울고 계시는 분이 계시다. 우리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는 분이 계시다. 그리고 그분이 <무한히 다정하게 두 손으로 떠괴어 주시는>그 은총 속에 우리의 목숨은 경영되고 또 영원으로 이어지는 것임을 알겠거니 이 가을은 슬기로운 눈을 떠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살펴보게 하는 은혜로운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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