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내리지 않으나 흐린 날씨다. 형철은 형일이가 다니는 중학교 앞에서 형일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교문 앞에 온 지는 30분쯤 됐을까 한데 한 시간도 더 되는 것 같다. 형철은 심심하다.
-민호라도 데리고 올 걸…
하며 발 앞에 있는 조그마한 돌멩이를 앞으로 찼다. 그때 갑자기 교정이 소란해졌다. 그러나 교정은 보이지 않는다. 교정은 높은 돌 층층대를 올라간 곳에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떠들어대며 층층대를 내려오기 시작했다. 검은 모자 검은 양복 회색 책가방 모두 꼭같다. 같지 않는 것은 얼굴과 키뿐이다. 모두가 형일이만큼한 아이들이다.
형철은 새 모자 새 양복 그것으로도 올봄에 입학한 일 학년생임을 알 수 있었다. 형철은 새까많게 층층대를 내려오는 아이들을 쳐다본다. 그러나 형일이는 보이지 않는다.
-왜 안 나오지?
형철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형철아!』
층층대 윗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형일이 경수 영호가 나란히 내려오고 있었다.
『형 나 온 지 한 시간도 더 돼』
하고 형철은 소리쳤다. 아이들은 층층대를 뛰어 내려왔다.
『미안해』
영호가 형철의 어깨에 손을 놓으며 말했다. 아이들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오늘 영호네가 얻은 시장 안의 가게를 청소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어제까지 목수가 할 일은 다 끝난 것이다.
영호의 어머니는 팔 물건 때문에 청과시장의 도매상에도 가야 하고 또 식료품 도매상에도 바쁘게 돌아다녀야 하고 영호는 저녁신문을 배달해야 한다.
그래서 어제 아이들은 청소와 물건을 운반하겠다고 자기들 스스로가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삼 일 전 영호 어머니가 지국장 아저씨를 만나고 또 시장 조합과의 계약을 끝내고 밤에 영호네 집에 들렀을 때『아주머니 과일만 취급 말고 다른 식료품도 갖다 놓아요 통조림이나 과자 도매상을 하는 친구가 있으니까 제가 보증을 서서 외상으로 갖다 놓을 수 있으니까…』
형일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가게를 얻었으면 했는데, 막상 생기고 보니, 물건을 갖다 놓는 일이 또 여간 아니예요. 과일은 그동안 거래해 온 도매상에서 얼마든지 갖다 놓으라고 해요. 그래서 그건 문제 없기는 하지만…』
영호의 어머니는 밝은 표정이었다.
『전 우리 형일에게서 영호네가 가게를 얻게 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눈물이 핑 돌았어요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더니 정말 그런가 봐』 형일의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아주머니나 영호가 다 성실하니까 모두가 알아 주는 겁니다. 아까 말대로 내일 내가 친구를 만날 테니까 걱정 마세요』
하고 형일의 아버지는 자신있게 말했다.『일마다 수고를 끼쳐서…정말 미안합니다』
영호 어머니는 진정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인생을 사는 건데 뭘요』
형일의 아버지가 말했다.
아이들은 영호네 가게 청소를 가는 길이기는 하나 소풍이나 가는 것처럼 즐겁기만 하다.
별로 고생 되는 일도 아니며 자기들이 자청해서 나섰고 또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시장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어느 골목에서『형철아, 어디 가니?』
하며 칠성이가 달려왔다.
칠성은 아이들이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면서 형철의 옆에 서서 있었다. 한참 가다가
『형철아 어디 가?』
하고 그때서야 깨달은 것처럼 물었다
『너 우리가 어디 가는 줄 알고 따라왔니?』
걸음을 멈추고 형일의 말에 깔깔대고 아이들은 웃었다. 칠성은 멋적게 됐다.
『우리 말야. 영호 형네 가게 얻은 걸 청소하러 가는 거야』
형철이가 말했다.
『그럼 나 가도 돼?』
『그럼!』
형철이가 말했다.
시장 가게에 닿았을 때 경수의 시계는 4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영호야, 너 빨리 지국에 가. 우리가 니네 엄마가 오실 때까지 깨끗이 치워 놓을게』
경수는 다시 팔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렇기는 하나 미안해서…』
영호는 정말로 미안한 듯이 말했다.
『미안할 건 조금도 없어 안심하고 가 봐!』
형일이가 웃으며 말했다.
영호네 가게는 입구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곳에 있었다. 옆 가게의 한 집은 도자기를 파는 상점이었으며 또 한 집은 옷을 팔고 있었다.
그리고 건너편의 식료품 가게는 눈에 띄지 않았다. 형일은 영호네 가게가 앞으로 잘 될 것처럼 생각되었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랬다.
『그럼 미안하지만 수고해 줘』
영호가 미안해하며 말했다.
『빨리 가라니까 그래』
경수가 영호의 등을 밀며 말했다.
영호는 앞으로 쓰러질 것처럼 하다가 바로 섰다. 아이들은 와 하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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