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엽 독일의 문화사가인 오스발트 슈펭글러(1880-1936)는 서양의 몰락을 진단했고 영국의 역사가인 토인비는 서양의 멸망을 선언했었다. 한 문화권의 몰락 내지 멸망은 그 문화권을 구성하는 개개의 국가 더 나아가서는 그 국가를 형성하는 사회와 가정의 몰락에서 출발한다.
가정의 몰락 및 멸망은 어느 누구보다도 남편과 아내라는 이 양 핵심 원소에 의해 좌우된다. 2차대전 이전까지 전 세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과시했던 서양 사회가 무질서의 혼돈 상황으로 방향감각을 상실하기 시작하게 된 근본 원인은 가정의 혼란, 다시 말해서 혼배성사의 계명을 무시함과 동시에 가정에 스며드는 내적 외적 불화를 잘 이겨내지 못한 데 있었다. 이런 가정의 불화는 성장하는 젊은 세대에게 악영향을 끼쳤던 것은 물론 더 나아가서는 사회 국가에까지 그 영향이 파급되고 마침내는 전 서양 문화권의 몰락이라는 위기의식을 안겨다 주었다.
슈펭글러와 토인비는 서양 문화권의 몰락과 멸망을 진단 내지 선고하는 데만 끝났지만 하인리히 뵐은 이 거대한 불치의 환자에게 투약과 수술을 시도했다.
바로 그의 작품「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가지고.
1953년에 발표된 이 작품에서도 역시 무대는 성 안톤수도원을 상징하는 전후의「쾰론」시였다. 서론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소설의 주제는 혼배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시대는 물론 1945년 이후가 된다. 그 당시 이 대도시에는 폐허ㆍ파편 조각ㆍ오물ㆍ겨우 보수된 판자집ㆍ빈곤만이 뒤덮고 있었고 오직 옛 모습 그대로 남은 것이라고는「일곱 개의 고통」이라 불리워지는 성당ㆍ자동식 금전 판매기 그리고는「가르니」라는 호텔뿐이었다.
이런 전후의 횡포 속에서 비참하게 시달리고 있는「쾰론」시민들과 함께 프레드 보그너 부부도 수난의 십자가을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 전후의 비참과 황폐 그리고 허무감은 드디어 이들 보그너 부부의 애정생활을 파괴함은 물론 남편 보그너는 자기 친자식들과도 별거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20세기에 탄생된 또 하나의 비극인 것이다. 드디어 악마의 여신은 보그너에도 파우스트 박사가 걸었던 그 길을 걷게 했다. 보그너는 알콜중독이 되어 이성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폐허의 잿더미 위를 방황했고 돈이란 돈은 모조리도 밖에서 잃곤 했다. 그의 호구지책을 연장시켜 주었던 것은 그나마도 성당의 전화계에서 받는 얼마 안 되는 근무수당뿐이었다. 이와 동시에 자식들을 데리고 구걸하면서 생존경쟁에 시달리는 처의 생활은 점점 더 비참한 지옥의 생활로 빠져들어갈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단 하나의 믿음이란 신부님의 따뜻한 충고였다.
신부가 주는 황금과 같은 신앙의 언질은 이들 두 부부로 하여금 끝까지 정조를 지키게 해 주었다. 그들은 차츰 서로가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어떤 주일 두 부부는「가르니」호텔에서 서로 만나서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는 단 둘만의 세계를 조한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두 부부는 다시 영원히 이별하기에 이르른다. 허나 몇 시간 지나 남편은 우연히 자기 처가 도시의 군중들 사이에 끼어 고독하게 방황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찰나에 갑자기 남편은 본질적으로 자기는 처에 예속되어 있음을 인식하게 되면 영원히 그녀의 곁을 떠날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와 함께 자식들이 기다리는 가정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프레드 보그너는 다시 성당의 전화계에서 옛날처럼 열심히 일하게되며 사랑하는 처ㆍ자식과 함께 절약에 절약으로 모든 역경을 극복하기 시작한다.
하인리히 뵐은「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라는 이 작품을 통해서 그 당시 혼배의 윤리관을 반영해 주고 있으며 또한 오늘날 무질서하게 회전하는 서양 사회의 타락된 애정 및 결혼의 가치관을 신랄하게 비판했고, 그 비판의 초점을 고정시켜 주었다. 이와 같이 방향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도 뵐은 물질만능주의적 퇴폐와 허위를 날카롭게 해부하면서 일면 진실한 인간성의 따뜻함을 보여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가톨릭 평신도로서 뵐은 몰락해 가고 있는 서양 사회에 한 가닥 희망의 횃불을 던져 주었다.
출판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