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0년 전 나는 신병이 악화되어 어떤 의사를 찾은 일이 있는데 의사의 오진으로 약을 먹고 실신、완전히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12시간 만에 소생한 일이 있다. 이후 나의 증세는 더욱 악화되었으며 백약이 무효하여 미사봉헌을 못한지도 벌써 10년이 넘는다.
그동안 병을 치료하기 위해 많은 전문의를 찾아 진료를 받았으나 치료비만 허비했을 뿐 아무소용이 없었다.
병원에서 주는 치료제라는 것이 안정제였고 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특효약이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모든 신경증치료에는 약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연치료를 하도록 힘써야한다.
처음 병을 치료할 때부터 여행을 한다든지 물 좋고 공기 맑은 심산유곡(深山幽谷)을 찾아가 심신을 수양하면 신경증은 쉽게 낫는다. 약을 과용하게 되면 부작용이 생기고 병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1967년 지병 때문에 부득이 온천장본당 신부직을 사직했다. 사제성직 50년 중 27년간은 그럭저럭 미력이나마 내 나름대로의 성직수행에 노력을 했으나 50년의 후반기는 늘 심한 두통으로 방을 지키는 일로 무사도일 교회에 큰 누만 끼치는 사람이 되었으니 미안하고 송구스런 마음뿐이다. 같이 서품 받은 동기동창 7명 중 네 분은 벌써 하늘나라로 가셨고 저와 최재선 주교님 장병화 주교님 세 사람만 생존해 있다.
대구 서정길 대주교님은 작년에 작고하셨다. 나는 벌써 나이가 78세. 80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고 사제가 된지가 어제 같은데 정말 유수 같은 세월의 흐름을 절감하는 바이다. 지난 50년의 우리가톨릭 교세를 회고해보면 실로 오늘과는 격세지감이 있다.
한국 가톨릭사전 통계자료에 의하면 내가 사제서품을 받은 1938년 적국 총 신자가 16만5천8백78명이었다. 현재의 2백50만에 가까운 신자 수에 비하면 실로 대단한 차이라 하겠다.
처음 사제가 되어 첫 부임한 곳은 경남합천이었는데 주일미사에 여교우와 할머니들이 약 20명에 남자는 딱 2명뿐이었다.
해방 그 다음해 1946년 통영본당에 부임했을 때도 역시 주일미사에 복사하고 합해서 남자 2명에 여교우가 약 20여 명뿐이었다.
그 당시는 교무금 주일현금 같은 것은 이름도 없을 때였으니 그때의 교회사정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하겠다.
그때 통영(충무 성당은 서호동 조금 높은 언덕에 위치해있었는데 샘이 없어 멀리서 식모라 물을 길어다 먹어야했으니 불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성당은 약 19평 남짓한 함석집이었다. 작은 신부사무실과 식당집이 있었다. 벌써 과거 5명이나 전임신부님들이 지나가신 꽤나 오래된 본당 이었다. 그런데도 이처럼 교회발전이 부진했던 것은 나라의 독립을 빼앗긴 왜전시대 때 알게 모르게 교회가 얼마나 많은 핍박과 괴로움을 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왜정식민지정책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왜정의 가혹함을 잘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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