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 5백 년 동안 유교사상으로 굳어있던 우리민족이 18세기 경천주교라는 새 사상과 부딪칠 때 조야에서는 이 새 사상을 조화시키지 못하고 근 백 년 동안의 유혈 대박해가 일어났던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웠다.
충효로 고착화 되었던 주자학(朱子學)은 인간은 오로지 효도하기 위하여 세상에 태어났다는 교설을 목표로 인간의 성정(性情)을 4단7정(四端七情)으로 설명하며 인간관을 설정하였기 때문에 인간을 우주창조와 창조주라는 넓은 안목으로 생각하는 천주교의 교리를 포옹할 수가 없었다. 천주교를 처음 받아들인 우리나라 몇몇 학자들은 천주교 교리와 유교의 가르침을 비교 연구하여 천주교는 유교를 반대하는 사상이 아니고 유교의 편협 된 안목을 넓혀 주는 사상이라는 소위 보유론(補儒論)을 극구 주장하였다.
한국 최초의 정식 총회장이며 순교자인 성 정하상은 순교장으로 끌려가면서「상재상서」(上宰相書)라는 글을 재상에게 올려 백성위에 인군(人君)있고 인군위에 상재(上宰)있음을 밝히고 그 상제는 천주교에서 말하는 만물의 주재자이신 천주와 같으며 천주는 만물의 대부모(大父母), 대주재자이시라는 것을 역설하였다.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인간윤리의 시작이요 끝으로 생각하던 재래의 유교사상을 보완하여 정하상 성인의 숙부인 정약용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무릇 모든 군자가 부모 섬김은 효제충신의 완성이다」라고 갈파하여 천주교 교리의 보유론적 입장을 천명하였다.
이조 조정은 이를 수용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미움이 촉진제가 되어 결국은 1백년에 걸친 천주교 박해의 길에 치닫게 되었다. 그러나 진리의 사상은 하느님이 뿌리는 원리이니만큼 칼과 창이 이를 말살할 수 없다. 결국 2백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는 효로써 인간을 규정하는 안목에서 벗어나 인간관에서 효를 생각하고 인류공동체 속에서 인간을 생각하는 넓은 안목을 우리는 가지게 되었다.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좁은 우물 안에서 하느님을 쳐다보던 구약사상에 젖어있던 유대아민족속에서 전인류를 위한 구원의 종교를 설파해야 할 사명을 띤 예수 그리스도가 당면한 첫 정신을 그 진수를 살리면서 보완하는데 힘을 기울여야 했다. 구약의 가르침은 율법과 예언서로 대표되었고 율법과 예언서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가르쳐준 모든 지혜의 총체로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보장된 안내지시로 여겨져 내려왔었다. 이 율법을 받은 유대아 백성들은 이 사실로써 하느님의 백성임을 자부하였고 그들의 생활은 하나에서 백까지 율법이 지배하였다.
랍비라고 불리는 유럽학자들은 율법서 해석학교를 나와서 공인된 율사가 되었고 이들은 민중의 존경을 받으면서 민중생활을 지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율법의 기본정신은 하느님이 인류에게 주신 인간생활의 기틀을 제시한 것이었고 그 자세한 실행세칙은 유대아 민족에게만 그리고 일정한 시기에만 해당되는 법규로 이를 율사들의 해석으로 정해졌었다. 율사들은 모세 5경을 6백13규율로 규정하여 온 백성으로 하여금 지키도록 하였었다.
이 제도는 오랜 동안 시행되면서 율법의 기본정신에서 떠나 자질구레한 외부사항에만 집착하는 율법주의로 세속화되었다. 오늘 예수께서는 율법의 기본정신을 되살리고 이것을 보완 완성시키는 당신의 입장을 제자들에게 천명하실 필요가 있었다.『나는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폐기하려고 온 것이 아니고 완성하러 왔다』. 다시 말하면 그 정신을 살리면서 그 부족했던 점을 이 새 시대에 완전한 것으로 승화시키려 왔다는 뜻이다. 그것은 다음 장에 나올 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복수, 원수에 대한 태도 여섯 가지를 예로 들어 과거와는 다른 정신으로 살아야 할 것을 가르치실 것이다.
율법불폐기의 태도를 분명히 하기 위하여 예수께서는『분명히 말한다』라는 다짐을 덧붙이셨다. 천지가 변하여도 율법은 하점(헤브레아 문자의 발음표시 중 가장 작은 뽈모양의 점)한 획(그리스어 9번째 문자, 가장 작은 문자 요따
작은 일에 충실하는 것, 이것은 교회영성생활의 기본지침이 되었고 특히 수도자들의 일상생활을 거룩히 지내는 지침이 되었다. 이 지침엄수는 하느님나라 사람들의 정의구현의 본보기이기도 하다. 그러니 작은 일을 크게 광고하고 큰일을 보지 못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의 제자들은 큰일을 하되 작게 드러내고 작은 일이라도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성실히 이행해야 한다. 이것은 하느님나라의 정의를 구현하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