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자 이성례(마리아, 1801~1840)
최경환 성인의 아내·최양업 신부의 모친
기해박해 때 젖먹이 막내아들과 체포돼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아내이며 가경자 최양업 신부 어머니인 이성례는 ‘위대한 어머니’, ‘온전한 신앙인’으로 불린다. 박해의 고난과 가난함 속에서도 남편을 도와 가정을 돌보고 모성까지도 하느님 앞에 내놓았던 그의 모습은 신앙인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충청도 홍주(현재 충남 홍성군 일대) 출신으로 내포 지역 사도 이존창(루도비코)의 사촌 누이 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이었던 그는 18세 때 최경한 성인과 결혼했다.
홍주 다락골(현재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 살면서 1821년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낳았다. 남편을 따라 신앙생활에 적합한 서울로 이주했으나 박해 위험에 강원도 김성을 거쳐 경기도 부평, 수리산 뒤뜸이(현재 경기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로 옮겼다.
이곳에서 맏아들 최양업은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떠났고, 그는 회장인 최경환 성인을 도와 마을을 교우촌으로 일구는 데 노력했다.
정든 고향과 재산을 뒤로 하고 자주 낯선 곳으로 이주하는 가운데 마리아는 모든 어려움을 기쁘게 이겨냈다. 자녀들이 배고프다고 호소할 때면 예수의 십자가상 고난과 성가정 이야기 등을 들려주며 현세의 고난은 잠시뿐임을 일깨웠다.
「기해일기」에 따르면 이성례는 이런 모든 고난을 큰 영광으로 삼았다. 마지못해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주 예수의 거룩하신 가르침과 이전 성인들의 행실을 따르기 위해 구하고 청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고 포도청에서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젖먹이 막내아들 스테파노와 수감되어 팔이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고문 속에서도 신앙을 증거했다. 이때 어머니로서 받았던 세상의 비난도 형벌에 못지않게 잔인했다.
최양업 신부는 훗날 서한에서 ‘연약하고 애처롭고 귀여운 어린 것들을 데리고 죽음을 자청하러 가느냐’는 모욕과 욕설을 감당해야 했다고 적었다.
남편이 매를 맞아 순교하고 스테파노가 더러운 감옥 바닥에서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본 이성례는 마음이 흔들려 배교하고 감옥에서 나왔다. 하지만 최양업 신부가 신학교 교육을 받기 위해 떠난 사실이 알려지며 다시 체포돼 형조로 이송됐다.
이때 함께 옥에 있던 신자들의 권면에 용기를 얻은 그는 이전의 잘못을 뉘우쳤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순교를 결심했다. 막내가 결국 옥중에서 숨을 거두는 것을 보면서도 순교의 뜻을 굽히지 않고 형장으로 나아갔다.
경기도 안양의 수리산성지는 남편 최경환 성인과 복자 이성례 마리아의 삶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 복자 권천례(데레사, 1784~1819)
권일신의 딸이자 권상문의 동생
조숙과 혼인해 동정지키다 함께 순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