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러 두 목사가 서울에 들어와 의료와 교육사업을 펴면서 전교활동을 시작한 것은 1882년 한미수호조약 체결 이후 외국선교사들에 대한 선교 자유가 어느정도 허락되고도 3년이 지난 1885년부터였다 1783년 이승훈의 영세입교를 한국 가톨릭 창설로 보면 개신교는 가톨릭이 1백여년간 무수한 박해를 겪고 그나마 얻은 선교 자유의 바탕위에서 비교적 수난없이 전교를 시작한 셈이다. 개신교는 이런 상황아래 그들의 특유의 적극적인 선교활동으로 서울 평양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 선교활동 6년후인 1900년 교세는 신자수 1만9천을 육박하고 있었다.
이 땅에 들어온 외국인 개신교 선교사들은 먼저 병원과 학교를 세우는 일에 독특한 재능을 발휘 1885년엔 서울 가동에 제가원이란 한국 최초의 현대식 병원을 세워 의술의 혜택을 못받던 서민 대중을 치료하는 한편 같은해 경신학교와 배재학당을 창립 인재양성에 초석을 다져나갔다.
이 두 학교는 한국에 있어서 현대식 학교의 효시이기도 하다.
이 무렵 가톨릭은 명동에 있던 바오로 수녀회가 맡아 운영하는「명동 고아원」을 가지고 있을뿐 박해에서 겨우 벗어나 제자리를 잡지 못한채 얼떨떨한 경황속에 살고 있었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가톨릭이 백여년간 겪어온 수난을 잘 알고 있는 터이므로 강렬한 고유 종교의 반대나 격열한 전례문제의 충돌없이 서서히 서민 대중을 파고 들어갔는데 우려한 나머지 어떤 선교사는 세례와 성찬식을 비밀리에 거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는 언제나 담을 쌓은채 냉담한 상태였다.
냉담한 표정은 가톨릭의 표정이었고 개신교는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표정이 굳어질수 밖에 없었다. 이 상태는 적어도 공식적으론 2차「바티깐」공의회 이후「교회일치」문제가 대두되기까지 계속돼왔다.
개신교(改新敎)란 말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 이후였고 가톨릭은 한결같이「열교」 (列敎)「열교인」(列敎人)이란 말로 이들을 몰아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처럼 예배당엘 들어가 본다던가 그들의 서적을 읽어본다던가 하는 일은 상상도 할수 없었고 그것은 천주를 거슬러 이단(異端)을 범하는 큰 죄로 알고 살아왔다.
천주교인들은 개신교인들을 마치 독버섯인줄 알면서 그것을 먹고 죽어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인양 측은한 눈길로 쳐다봤다. 그래서 이들과 상종했다가는 결코 이로운 일이 없다고 단정, 행여 철없는 자식들이 예배당 울안에서 노는것조차 책할 정도였다.
1910년 「경향잡지」에 어떤 신자가 『신문에 난 구세군 모집 광고를 보고 들어가려 하는데 어찌할고』하는 문의에 대한 편집자의 대답은 그야말로 단호하다.
『교우중에 그렇게 무식하고 정신없는 사람이 있으리오. 성교회 신문에 구세군에 관한 말이 도무지 없고 또 아무 일이던지 성교회의 가르침과 풍습밖에 가령 죄 아니될듯한 것이라도 본당 신부에게 아무말 아니하고 함은 대단히 온당치 않거늘 하물며 무슨 회(會)에 들어가는 일을 제 생각대로 어찌 마구하리요.
구세군이라 하는 것이 무수한 열교중에 한가지 명목이라 누구든지 그 회에 들어가는자 성교회에서 떨어져 나가고 열교인이 되느니라』(관면)
구세군을 무슨 모임 정도로 알고 물었던 이 신자는 대단한 면박을 당했고 교회는 이를 계기로 선자들의「열교」에 대한 어정쩡한 인식에 찬물을 동이로 부어댄 셈이다.
이러니 개신교에서 발행한 책 더구나 성서를 읽는다는건 언어 도단에 속하는 것이었다.
혹 어쩌다 개신교 번역성서가 집안에 굴러들어오면 종이가 귀한 시대라 변소에 매달아 놓고 휴지로 쓸만도 하겠지만 성서니 그런 무례를 범할수도 없어 아궁이 앞에 지켜앉아 태우거나 땅에 묻기가 일쑤였다.
전교상「열교책」을 꼭 보아야할 사람에겐「관면(寬免)」을 주어 보도록 했고 그밖에 사람들에겐『천주의 말씀은 은혜를 주는 맑은 물과 같은데 이 물이 샘으로조차 아니오고 열교교리라는 흠통을 지나옴으로 그 흠통 속에 부정한 것이 많아 물을 상하게 했으므로』보는 것을 엄히 금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열교에서 세운 신식학교」에 교우 자녀를 보내는 것도 금했다.
그러나 한국의 명문 사학(私學)이 대부분 개신교 선교사들이 세운 것이고 보면 교우 중엔 자녀를 더러 이런 학교에 보낸 이도 있었다. 한 교우가 아들을 배재학당에 보냈는데 이를 안 본당 신부가 하루는 신자들이 모인 앞에서 노발대발 불호령을 내렸다. 『열교학교에 다녀 출세하는 것도 좋지만 영혼을 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소위 회장이란 사람이 이모양이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오늘부터 성사를 막을터니 그리 알라』고.
이 회장은 그러나 버티고 자식을 계속 배재학당에 보냈다. 훗날 배재학당을 마친 이 소년은 그 지방 군수가 되어와 자유당 시절 정권과 교회와 의 좋지못한 사이에서 교회가 당한 어려움을 솔선해 도와주었다. 같은지방에서 사목하던 신부와 목사 사이는 어떠했는가.
『구태어 찾아가 대화를 나눈다든가 식사를 같이 하는 일은 없었고 사람에 따라 마주치면 목례정도 아니면 그저 지나치곤 했지요』(이기순 신부)
그런 반면 의식적으로 담을 쌓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어떤 신부들은 교리나 전례같은 딱딱한 문제는 젖혀놓고 서로 배울점은 기탄없이 나누기도 했는데 교리교육에서 시청각 교재를 훨씬 앞서 사용한 개신교 방법을 젊은신부들은 많이 보고 배웠다.「교회일치」 운동이 전개되면서 성당과 예배당에서 일치기도를 바치게 된 것은 불과 몇년전 일이고 보면 2년전 어느모임에서 개신교 노장목사가 한 다음말은 지난 80여년간 가톨릭과 개신교가 얼마나 소원(疎遠)했던가를 잘 말해준다.
『목사생활 40년동안 무수히 성당 앞을 지나 다녔지만 그때마다 저 안에선 무슨일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궁금히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 안에도 진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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