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특성을 여러가지로 규정할 수 있겠지만 한결같이 느끼는 것이 현대사회가 빨리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 급변하는 현대
여러가지 통계숫자나 자료를 제시하기 전에 이는 기정사실로 모든 이가 이에 수긍할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혹시 어떤 이는 이런 빠른 변천에 실증을 느껴 옛날 아늑했던 때를 그리워하기도 하고 또한 정반대의 경우도 있고 그 중간적 입장도 있다.
그러나 사회여건은 어떤 사람의 소원에 아랑곳 없이 혹시 빨리 혹시 천천히 변해가고 있다. 빨리 변하는 것이 좋은 일인지는 각자 보는 사람들에 따라서 다를 수 있겠으나 이는 한 개인의 걷잡을 수 없는 객관적 현상인즉 우리는 그 변화를 극복하든가 혹시 패배하여 후퇴하든가 양자택일을 하지 않을수 없다.
한국 현실은 다른후 진국들과 비교해 볼 때 비교적 빨리 사회여건이 변해가고 있다.
어떤 이는 이를 환영하고 어떤이는 이를 개탄하며 어떤 일이 일어났을때 흔히 말하기를『옛날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요새는 인심이 각박해져서』하고 탄식한다.
■ 세대간의 격차
길지도 않은 인생 70 사이에 이렇게 많은 차이가 있을까하고 놀랄만큼 세대차이가 격심하고 심지어는 세대간의 갈등 운운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으니 현세대를 나무라는 그 세대가 젊었을때에 그 전 세대한테서 아무런 비난도 마찰도 없었는지?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어떤 형태로든지 그들도 전세대와 어떤 격차가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으리라 생각한다.
이렇듯이 사회여건이 변천하는것이 기정사실이며 또한 당연한 것이라면 교회는 초자연적 단체이므로 아무런 대책없이 옛날 하던대로만 하면 된단 말인가. 성경에 한점 한획도 더하지도 덜하지도 못한다 했으니 따라서 신성한 교회인 즉 건드리지 말라 할것인가? 그렇다면 이는 교회의 정의가 뭣인지 모르는 말이다.
■ 시대에 적응하는 교회
교회의 구성요소가 곧 우리 신자들인 즉 1천년 전의 신자와 오늘의 신자가 같을 수는 없다. 따라서 다른 사회여건을 타고난 우리에게는 다른 법으로 신앙생활을 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한때는 교회안에 혁신ㆍ보수의 두세력이 있어 서로 자기말만이 옳다고들 했다. 이 입씨름의 시작은 먼저 가신 교황 요한 23세에서 『교회 공기가 침체되어 답답하니 창문을 활짝열어 새공기를 좀 들어오게 하라』하심으로써 공의회 소집을 발표하시자 시작됐던 것이다. 그 후 19년도 안된 오늘날 교회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어떤것은 꼭 필요한 것이 었고 어떤것은 바뀐다니까 공연히 필요없는 것까지 바꾸어서 오히려 불편을 느끼는듯한 감마저주고… 하여간 많이 바뀐것만은 사실이다.
■ 교회쇄신의 문제점
10년전의 세계와 오늘의 세계가 다른 즉 교회를 다스리는 방법도 즉 사목방법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나올만한데 지금 아무도 이 문제에 확실한 대답을 줄 사람은 없다. 사목방법이 한날 양복 갈아서 기성복점에 가서 입어보고 몸에 맞는 것을 골라입으면 되는것이 아니기 때문니다. 그렇다면 자연히 이렇게 저렇게 모색하여 보기 마련인데 여기에는 당연히 시행착오가 따르기 마련이다.
따라서 약간의 시행착오에 『그것봐라 내가 뭐라 했어』하고 뒤에 앉아 코웃음만 칠것이 아니라 새 문제해결에 신자 성직자 다같이 협력해야 할것이다.
우리는 변천하는 사회여건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해서 노쇠 쇠퇴또는 사멸한 많은 종교가 있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은 하느님의 성신이 세상 마칠때까지 같이 있겠다고 보장해주신 종교인만큼 결코 노쇠하거나 사멸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가톨릭은 영원히 젊은 종교이다. 가톨릭은 불사신의 교회이다.
새시대 새문화 새환경에 재빠르게 적응할줄 알고 (AGGEORNAMENTO)그에게서 새힘을 얻어 교회자체를 풍요케하여 2천년간 여러가지 난관을 극복하면서 항상 발전해왔기 때문이다.
■ 영원히 젊은 교회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의 성신이 보장하신 바를 확신하고 어떠한 여건이나 어떠한 일을 만나더라도 겁낼것 없이 자신을 갖고 대처해 나가야 할것이다.
교회 장래를 우려한다느니 건나다느니 하는 필요없는 노파심을 버리고 용감하게 하느님의 섭리에 의지해야 할것이다. 다소간의 인간적 약점과 인간적 실수를 각오하고서라도 용감하게 앞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즉 하느님의 섭리에 의심을 품지말고 비겁하게 겁만 내지도 말고 용감하게 앞으로 전진해야 할 것이다.
용감한 자만이 온 세상을 차지할 수 있다고 사도 바오로께서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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