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교회도 전세계 다른 교회와 같이 매우 급진적인 변화를 겪고 있으나 이 변화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모르고 있다. 저술가요 언론인인 알빈 토플러씨는 1965년 공의회가 끝난해에 공의회에 대하여 쓴「미래의 충격」이란 책에서『우리 사회에 변화를 일으키고 그것을 요구하는 자와 그 변화에 대비시키는 자들까지도 실제적인「적응」에 대하여 거의 모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했다.
사실 지금 우리는 불쌍하게도 혼란을 겪고 있다. 주교 신부 수도자 평신자 그리고 자신은 이런 혼란에서 예외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 까지도 혼란을 겪고 있다.
신자는 비록 신앙때문에 고통을 당하기 마련이지만 미국 교회는 이런 혼란때문에 평화롭고 안정된 前시대보다 더욱 심각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다.
포르담 대학교의 오르시 신부(예수회)는 현재의 혼란이 순례자인 우리가 길을 잃은데 있다고 한다. 『고속도로의 평탄한 길을 달리던 자가 갑자기 숲속으로 들어선 사람같이 우리는 당황하고 있다. 이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알고 있지만 관목들이 길을 막고있어 하늘의 별들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길이 깨끗하게 치워지고 하느님 백성전체가 다시 한 북소리에 맞추어 행복스런「아멘」과 「알렐루야」를 창하면서 행진할 수 있도록 탄식하며 기도하고 있다.』
이어서 오르시 신부는 어젯날의 행복스럽던 시대로 돌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에 동감하면서도 훌륭한 신학자인 그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완전히 들어주시지 않으리라고 한다. 교회안에 어떤 질서가 필요하지만 혼란도 필요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기독교 신자가 된다는 것은 호란과 함께 살면서 어떤 질서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어디서나 우리가 안정을 찾아야 하지만 과거와는 다른 방법으로 찾아야 한다. 우리의 하느님은 질서의 하느님이지만 그와 똑같이 역시 혼란의 주이시다』라고 그는 주장한다.
또한 『불안과 무명(無明)은 인간과 신자생활의 조건이다』라고 하면서 『우리는 그것들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불안과 무명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우리가 어두운 숲속을 거닐때나 망망한 바다를 항해 할때라도 굳은 신앙을 가질 은총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질서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혼란중에도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을 인도해주시는 성신을 믿는다.』
그렇다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해줄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잠시 길을 잃은 순례단이 자기들 지도자의 말을 듣지 않고 길가에 주저앉아서 하느님이 어떤 기적을 행하여 구해주기를 기다린다면 단조로운 권태와 싫증, 나아가선 갈증과 기아만이 있을 뿐인것과 같이 지상 여정에 있는 교회-특히 미국 교회-가 뒤로 주저앉아서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혼란에서 구해주기를 기다린다면 그것은 교회본질 자체에도 어긋나는 일이고 재앙을 초래할 뿐이다.
그러나 교회가 이 혼란에서 뒤로 주저앉고자 하는 유혹을 이겨내어 교회의 전 회원들과 조직들을 충동하여 자기생활을 정화하고, 교회의 참된 본질을 의곡하거나 흐리게 하지 않는 교회생활이나 구조의 돌발적인 형태들에 대해 비판적인 눈으로 볼수 있는 용기와 창의력을 길러준다면 미국교회로서는 얼마나 자랑스런 일이 겠는가.
이것은 확실히 고통스런 일이며 우리의 복음적 청빈덕을 시험할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교회안에서 항상 해오던 방법 또는 근래에 쓰는 방법이 이미 시대에 뒤진 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새로운 방법 새로운 구조가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정도의 복음적 청빈덕이 필요하다.
특히 미국교회는 그 역사나 정치의 전통때문에 교회 공동성이란 말의 뜻을 파악하거나 그것을 교회 모든부문에 실천하기 위한 새로운 용어나 방식들을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다른나라 교회보다 더욱 쉽게 모색할수 있다. 그러나 현대의 위기가 급박한 그 만큼 빨리 이런 일을 감당해 나갈수 없다는 것도 확실하다.
변화를 위한 변화나 전통을 무시한 변화가 아닌 필수적인 변화는 대부분의 사람들이나 제도들에겐 굉장히 고통스런 과정이다. 미국의 유명한 사회학자 니스벨 신부가 지적한 바와같이 「사회변화는 규칙적이거나 고정적인 것이 아니지만 어떤 변화가 있기를 우리는 희망한다. 그러나 우리 주위를 돌아 볼 때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 시대에 뒤진 과거의 것을 되살리는 자들, 변화에 대해 제도화된 저항 등 때문에 사회적 문화적 변화란 그 목적을 달성하기는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결론을 내릴수 밖에 없다.」
순수한 인간제도하에서는 이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과 신적인것이 역설적으로 일치하고는 있는 교회는 그 인간적인 면에서는 인간 사회에 적용할수 있는 사회적 변화를 따르겠지만 신적 성격때문에 인간역사를 초월한 목적을 향해 낙관적으로 나아갈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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