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에 따르면 여색은 남자의 당연한 욕정임을 인정하면서다만 군자현인은 여색보다 덕성을 더 중요시해야 된다는 가르침을 펴고 있다. 논어에 보면 군자가 삼가야 할 것이 세 가지 있는데 혈기미정인 상태의 청소년시기에는 색을 멀리할 것이며, 혈기 방자한 장년시기에는 다툼을 경계할 것이며, 혈기쇄진한 노년기에는 욕심을 경계하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내 아직 호덕(好德)하기를 호색하는 것만큼 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로써 미루어 볼 때 공자의 성윤리는 극히 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동양사람들이 처첩의 생활을 당연시한 것을 보면 여색이라는 것은 패가망신을 방지하기 위한 하나의 경계이지 그것을 죄악시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프로이드의 심부심리학은 한 걸은 더 나아가서 색이라는 것은 인간 성정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침전물처럼 인간성의 심층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공자의 성에 대한 견해나 프로이드의 심층구조설이나 우리의 생활경험에서 보면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자연질서에 머무는 윤리만을 생각하면 옳은 견해일 수도 있다.
구약성서세계에서는 인간의 욕심을 경계하는 훈계에 그치지 않고 명확한 성문법으로 인간생활을 인도하고 있다. 인간은 성욕뿐 아니라 생욕 물욕 등이 인간생활에 활력을 주기 위하여 자연적으로 부여된 것인데 그것들은 조화의 지혜가 결여되면 오히려 인간의 온갖 불행의 온상이 된다. 그런 불행을 막기 위하여 하느님이 모세에게 일러주신 것이 십계명이다.
『간음하지 말라,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구약성서의 가정윤리는 준엄하다. 이스라엘민족의 결혼계약은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성약개념에서 나오는 존엄성을 지닌다. (호세2, 4~3, 31). 그 성약은 이스라엘백성의 하느님께 대한 충성심을 요구한다(말라2, 10~16). 그러므로 이 문제에서 불충한 죄는 대역죄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성약의 정신에서 유대아인들의 간음죄 법은 여자에게만 해당된다.
그것은 백성은 하느님의 소유인 것처럼 여자는 결혼 전에는 가장인 아버지의 소유이고 결혼 후에는 남편의 소유이라는 구약개념에서 온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간음이 들어있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은 여자에게만 해당된다. 남편을 하늘처럼 모셔야 했기 때문이다.
간음녀라는 말은 있지만 간음남이라는 말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늘 대목에서 예수께서도 이법을 시인하셨지만 이제 새로운 사랑의 법으로 이를 시정하고 현대 민주사회의 기틀을 놓으시려는 것이다. 사형에 처할 간음녀를 잡아왔을 때 예수께서는『죄 없는 자 그녀를 치라』고하시고 용서하셨다. 간음이 죄라면 남자의 간음도 죄여야지 어찌 여자에게만 해당되어야 하는가. 이 자연이치를 시정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셨다.
간음은 율법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이 아니고 죄악성의 뿌리는 사악한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이 문제는 들키면 죄가 되고 들키지 않으면 죄가 되지 않는 물리적인 사회와 깨끗한 양심을 지향하는 영성적인 세계와의 문제이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자는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 때문에 곧이곧대로 살고자하는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갈등과 영성적인 절망을 느끼는 수가 있다.
그러나 설명을 들으면 좀 가벼워질 것으로 생각된다. 성서외적인 유대아인들의 문헌 이사카르의 성약이란 책에도 눈요기를 조심하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그 교훈도 어디까지나 남자들을 보호하는 견지에서 한 훈계이다.
여자는 언제나 남자에게 위험스러운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가 접근해오면 눈을 감으라고 훈계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시편『허영을 보지 않도록 내 눈을 돌려주소서』(119, 37)의 기도를 이런 뜻으로 드렸다. 그런데 남자가 여자에게 위험물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원칙의 문제이다. 문제는 마음속에 있는 사악성이며 잘못을 피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의 모든 성전이 향해야할 선으로의 이념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문제는 성욕의 문제만이 아니고 덜 죄스럽게 생각되는 거짓말이나 물욕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에 거짓말 안 한다고 자신 있게 손들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고 진실 되게 살아야 한다는 이념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물욕을 안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가. 그렇다고 물욕에 잠겨서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문제는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있다.
또 거짓말이나 물욕이 성욕보다 덜 죄스러운 것도 아니다. 사회의 이념인 자연법의 질서라는 점에서 보면 하찮은 거짓말이 더 나쁠 수 있다. 선을 향하여 우리의 삶을 올바로 잡아야 한다는 뜻에서 예수께서는 사악한 눈길질을 하지 말라는 새 법을 내리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어디있겠느냐고 제자들도 항변하였지만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부여받은 눈ㆍ귀ㆍ손ㆍ발은 올바르게 보고 올바로 듣고 올바르게 다루고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 그 하나가 온몸을 망가뜨린다면 없느니만 못하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