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부터 한국 가톨릭에는 회장(會長)이란 직책이 많다. 교회 행정상의 일정한 지역을 대표하는 본당 회장 구역 회장 공소 회장을 비롯 연령회 부인회 청년회 등 기능별 모임이나 단체의 평신도 대표도 회장이라 불러오고 있다.
또한 회장직에서 물러난 유력 평신도나 신앙과 덕망이 있는 신자에게도 예우의 표시로 회장이란 직함을 붙여 부르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감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회장」이 가지는 교회안에서의 고유한 지도적 역활과 그 유래를 알고보면 족히 이해가 간다. 회장이란 말은 중국에서 사용되던 말을 초기 교회때부터 그대로 따라 사용해 온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에서 회장은 신부가 없는 부락을(즉 공소) 맡아 책임지고 교리를 가르치며 그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하는 신부의 보좌이며 대리자이며 지도자였다.
한국 가톨릭 초기시대인 소위 「가성직시대」에 신부는 있었어도 회장은 없던걸로 봐 회장은 1794년 한국에 파견된 첫신부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 의해 임명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듯 하다. 이때 주 신부를 모셔왔고 입국이 탄로되어 관헌들이 주 신부 처소를 급습하려 하자 신부를 피신시키고 대신 주 신부로 변복하고 있다. 잡혀 치명한 최인길이란 신자는 조선교회 사상 최초의 전교회장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따라서 회장은 단순히 지역이나 모임의 대표라는 점보다 가르치고 지도하는 교육적 기능이 중시되는 직책이였기에 신앙과 덕망이 있어 신자들의 모범이되는 사람에게 회장의 칭호를 부치는 것은 이해할만한 일이다.
박해시대를 일관해 거동이 자유스럽지 못한 신부를 도와 교회를 꾸려나가는 한편 산곡에 무리지어 흩어져있는 소위 「교우촌」을 훌륭히 이끌어온 유명무명의 많은 회장을 비롯해 교 회사상 불멸의 업적을 남긴 회장들의 깊은 신앙과 교회내에 대한 열의가 오늘의 교회를 이룩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기해년(1839) 대박해를 소상히 적은 「기해일기」를 남긴 서울회장 현석문(가를로)을 비롯 후에 7대 주교가 된 뮈뗄ㆍ민 신부 일행을 맞아 두달간 집에 숨겨놓고 한국의 풍습언어를 가르쳐 포교활동의 기능을 닦아준 황해도「배마당」교우촌의 박래원(프란치스꼬) 회장, 4대 베르뇌ㆍ장 주교의 오른팔이 되어 관서지방을 개척한 김기호(요한) 회장 등은 너무도 잘 알려진 교회사적 인물들이다. 회장들은 교회를 건설하기 위해 때로는 범인(凡人)이 흉내낼수조차 없는 용기와 담력으로 바다를 건너 신부를 모셔오고 치명자의 시체를 밤새워 옮겼는가 하면 관헌의 눈이 닫지 않은 산골로 피신, 화전을 일구어 개꼬리 같은 조이삭이 필 때면 들어 닥치는 포졸에 쫓길 때 귀중한 필사본 성서교리서, 성물을 안고 다니면서 신자들을 가르치던 어버이 같은 회장들의 숨은 공로를 누가 감히 필설로 표현할수 있겠는가. 박해가 끝나고 신교 자유의 햇살이 비치기 시작하면서 공소 회장들은 교회 재건운동과 함께 색다른 과업을 스스로 맡아 처리했으니 그것은 오늘날의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다. 박해중 쫓기는 개처럼 팔도강산을 헤메이다 보니 온전한 가족이 있을리 없다. 어버이를 잃은 자식, 눈길에 자식을 떨군 어버이들이 가족 찾아 이 마을 저 마을로 눈물을 뿌리며 다니는 애타는 정경이 허다했다.
이들은 교우마을을 찾아들기 마련이었고 회장들은 이들이 찾는 가족에 대한 정보는 물론 묵는 동안 숙식 일체를 내 가족에게 주듯 제공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거지꼴이 되어 유랑하는 교우 가족에겐 공소 회장들이 발벗고 나서 집과 농토를 마련, 살 길을 열어주기도 했던 것이다. 그 후 교회가 제자리를 잡아가면서 회장의 지위는 신앙지도뿐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쳐 게으르고 노름 좋아하는 신자에겐 볼기를 치기도 했고 도가 심하면 마을 추방령을 내리기도 했다. 일년에 두 서너번 다녀가는 신부를 대신해 신자들을 이끌어가야 할 공소 회장이고 보면 임명에 여러가지 조건이 따르게 마련이었다. 순교자의 후손이면 더욱 좋고 우선 신앙이 두터워야 하여 덕망과 지도력이 있어야 하며 어느정도 생활기반도 있어야 했다. 이런 자격이라면 교우뿐만 아니라 마을의 지도자격이니 회장중엔 뛰어난 지도력과 공헌으로 미신자에게서도 「회장님」칭호를 듣기도 했다.
지금도 지방에 따라선 이미 타계한 회장이지만 남긴 업적을 잊지 못해 그 후손을 가르칠 때 죽은 아무개 회장 아들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을수있다. 한마을 신자들이 가족처럼 지내던 시절 회장댁은 지금말로 신자생활의 센터구실을 해야했다. 매스콤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 긴여름 밤 노소가 모여앉은 회장댁 사랑방에서 듣던 선조들의 피눈물나는 얘기가 아버지를 통해 아들에 전해지는 가운데 아들은 자랑스런 선조의 모습을 그리고 신앙의 긍지와 자세를 배울수 있었다. 그 사랑방은 오늘을 사는 우리를 신앙의 고향인 셈이며 주역은 회장들임은 물론이다. 한때 본당 회장은 물론 공소 회장에게까지 대단한 권한이 부여된 적이 있었다. 1886년 신교자유가 허락된후 서양신부들은 황제가 준 활동을 보장한다는 칙서를 품고 수단자락에 바람을 내며 의기양양할 즈음 이들의 위세에 힘입은 마을의 공소 회장도 원님을 상대로 삿대질을 할수 있었다. 가령 재물을 탐낸 원님이 신자를 가두고 매질이라도 하는 날이면 회장이 나서서 『황제도 마음대로 못하는 서양신부가 가르치는 천주교인을 이럴수가 있는냐』고 서양신부들의 치외법권적 권한을 원용했던 것이다. 1903년경 황해도 장연읍 도습리 공소 회장은 천주학생이라고 욕하는 사람을 마을 앞 나무에 매달고 볼기를 친 일도 있었다(구천우 신부(76)중언) 이를 본 약삭빠른 미신자는 재빨리 「십이단」을 구해내 보이며『나도 천주교인이요』하는 촌극도 있었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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