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말없이 길모통이까지 걸었다. 갑자기 한 친구가 큰소리를 냈다.
『자네 주인은 참 좋던데!』
『그래 그런데 왜 손에 키스는 하지?』
『손이 아니라 반지야. 복종과 결합의 표시죠.』
『그것 참 우습다.』
『그러나 나도 그런 주인만 가졌다면 복종도 하고 반지에 키스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분은 주인이 아니야, 아버지시지』
피에르 말에 또 다시 모두 조용해졌다. 지하철 계단을 내려오는 도중 갑자기 한 사람이 생각난듯 중얼거린다.
『이봐, 그 양반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은데. 이런 기분 알겠나 자넨?』
다음 주일 추기경의 명령으로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빠리」의 성당 문앞에서 동맹파업한 노동자의 가족들을 위해 모금을 했다. 추기경의 메시지는 편집실에서, 성당 사무실에서, 이사회의에서, 정당 본부에서, 싸롱에서, 선술집에서, 검토되고 연구되었다. 검토는 되었으나 변경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엄격한 명령이었다.
프랑스인의 반이 이 메시지를 마치 견책으로 느껴 자기 합리화의 길을 찾기에 바빴다. 어떤 신문들은 메시지를 왜곡시키고 또 어떤 신문들은 추기경의 건강을 운운하며 은근히 추가경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암시를 풍기기도 했다.
그의 정신은 이십년 전부터 벌써 완전히 하느님의 것이었단다.
그러나 또 한편 많은 주교들이 추기경의 뒤를 따랐다. 이 주교들의 부름에 수백만명의 신자들이 처음으로 정치적인 편견없이 노동자들의 조건을 진지하게 생각하려 했다.
그리고 그들은 처음으로 노동자들에게서 자기의 형제 그리스도를 발견할수 있었다. 그때까지는 많은 「빠리」주민들이 새옷을 입고 미국제 자기용을 몰고 기름진 얼굴을 들고 다닐 때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 가난하고 헐벗은 교외지대를 언짢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 중에는 진실로 양심과 영혼이 고통을 느끼는 자도 적지 않았다. 이미 하느님 앞에 그들은 부끄러움 없는 사람이라고 자처할수 없게 되었다.
『가시관처럼 「빠리」주위를 둘러싼 이 교외지대』
이것이 추가경이 피에르와 그의 친구를 또 그밖의 모든 방문자들에게 보여준 회답이었다.
「싸니ㆍ르ㆍ오」의 본당신부가 추기경의 메시지를 읽은 바로 그 주일에 피에르는 그에게 동조위원회의 회원명단에 서명을 해달라고 부탁하러 갔다. 그렇게하면 본당 주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클 것이 틀림없었다. 신부들이 작업복을 입었건 수단을 입었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가 하나 있을뿐이다.
본당신부는 난색을 표하며 침울하게 대답했다.「싸니ㆍ르 ㆍ오」의 공장주들이 이 본당의 중요한 후원자들이니 자기 개인의 의견의 여하를 막론하고 그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사무실 안을 쉴새없이 이끝에서 저끝으로 거니는 그를 피에르는 냉랭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본당신부가 얼굴을 돌렸을 때 피에로는 괴로움에 일그러진 표정을 발견하자 갑자기 동정이 갔다.
『본당신부님, 신부님의 가르침에만 여기 본당교우들이 따라온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이제 때가…』
『그들에겐 아직 때가 날아있지만 난 그렇지 않소』
『신부님, 요전날 신부님 마음을 상해드렸다면 사과드립니다. 그 후 많이 생각해봤습니다.』
『나도 그랬소.』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피에로는 어쩐지 뭉클해가는 가슴을 안고 본당신부의 곱게 다듬은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골에 사는 친척을 찾아간 기분, 그렇다 그와 흡사한 기분이다.
신부과의 손바닥만한 마당에서는 새들이 나뭇가지 사이에서 자리 다툼을 하고 있었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태양빛이 사무실의 반을 눈부시게 비쳐주고 있었다. 본당신부는 어두운 쪽에 서 있었다. 새소리를 들으며 눈부신 햇빛을 받는 피에로는 본당신부의 존재를 일순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피에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가 그들에게 옷, 식량, 돈을 많이 내라고 하겠소. 그리고 당신한테 그것을 전해주겠소.』
『신부님도 아시다시피 돈이…』
『나도 알고있소. 그러나 필요한것만은 사실 아니오? 그렇다면 그것이 어느 주머니에서 나오면 무슨 상관이 있겠소?』
피에르는 그에게 다가섰다.
『그 돈은 신부님 우리한테 빚진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선물처럼 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나더러 선택을 하라는거군. 또 한번 선택을 강요하는군』
그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피에르는 그가 화를 내는줄 알고 곧 변명을 하려했다.
『전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습니다.』
『당신 얘기가 아니야』
또 다시 오랜침묵이 흘렀다. 새들은 햇빛속을 자유로이 날아다니고 이 늙은이는 병자처럼 숨소리가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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