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 2백년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 전반기 1백여 년간의 역사는 순교로 점철되어 있다. 이 박해의 기간 동안 대략 1만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 때문에 이 시기의 역사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특징으로는 순교의 전통을 들 수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가 자랑하는 순교의 전통은 그리스도교가 가지고 있는 자랑스러운 공동자산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의 교회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던 당시의 서유럽 교회도 순교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 베트남 등 유교문명권에 속하는 나라의 그리스도교회사에서도 순교의 전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순교 전통은 그리스도교 공통의 순교전통과도 관련을 맺으며 그것을 강화시켜 주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순교전통은 한국교회사나 민족사 안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교회사의 일장에서도 주목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교회의 역사에서 드러나는 이 고귀한 전통에 관해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순교자들을 특별히 존경했으며 순교자의 모범을 따르고자했다. 그러기에 우리 초기교회의 신도들은 1791년에 순교했던 윤지충과 권상연을 특별히 기억하고자했다. 1801년에 순교한 이순희ㆍ유항검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의 뛰어난 모범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박해 시대를 통해서 계속 이어지고 있었던 것도 순교자에 대한존경의 자세와 관련된다.
박해 시대의 신도들은 이렇게 선배순교자들 상찬하며 그들의 길을 자신도 걷고자했다. 박해 시대의 신도들이 순교자에 관해 특별한 신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순교자의 모범과 순교자들의 참다운 지혜가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며 구원한 진리에의 믿음을 굳게 해주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사람의 죽음
박해시대를 살았던 신도들이 존경했던 그들의 선배순교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매우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당시의 순교자 중에는 정약종이나 그 밖의 저명한 순교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순교자의 대부분은 이름 없는 중인이었거나 양인이었다. 또한 순교자 중에는 신분제의 질곡에서 헤매고 있던 천인출신들도 있었다. 이들은 거개가 특징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용감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형제나 부모와의 이별에 슬퍼하고 자식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간직했던 순교자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감옥에 갇혀 밥을 주지 아니하면 배고파했고, 배교를 강요하는 매질에 아파가고 이를 피하려 했던 순교자들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이웃에 대해 서운한 생각을 가지기도 했으며,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회의했던 사람도 있었다. 이렇듯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순교했던 것이다.
이 평범한 사람들이자신의 신앙을 증거하며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까닭은 그들이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인내할 수 있었고 조용히 참다움을 사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여느 사람들보다 조금 더 하느님의 가르침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고, 하느님이 창조해준 자신의 영혼과 인격의 소중함을, 자신의 양심이 자랑스러움을 조금 더 강하게 느끼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결코 부자도 아니었고 남다른 학식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다. 그들의 용기가 남달리 출중했다고 보기도 어려우며 그들의 신심이 살아있던 다른 신도들보다 특별히 곧았던 것으로 생각하기에도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그들은 「특별히」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조금 더」그러했던 것이다. 「조금 더」의 마음가짐 때문에 아마 그들은 순교자가 될수 있었고, 오늘을 사는 평범한 우리들에게도 모범을 줄 수 있는가 보다. 순교자는 결코 영웅이 아니라 「조금 더」의 마음가짐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기에 오늘의 평범한 갑남을녀(甲男乙女)에게도 친근하게 말을 건낼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순교의 의미
순교란 무엇인가? 순교는 평범한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행한 신앙에의 증거를 말한다. 성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순교의 전형으로는 이사야 예언서 32장 이하에 나오는 「야웨의 종」을 들고 있다. 「야웨의 종」은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고통을 감수하며 묵묵히 죽어가는 존재였다. 이 「야웨의 종」은 신약시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예시해 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과연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무죄하면서도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첫 번째 순교자」로 지칭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려면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모범을 사도행전의 스테파노를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스테파노는 이렇게 하여 「순교자의 우두머리로 불리우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스테파노의 모범을 실천하려던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또 다른 그리스도 또 다른 스테파노가 되어 자신에게서 복음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자신의 이웃에 복음을 선포했다. 자신의 목숨을 건다는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자신의 신앙을 증거하고 복음을 선포했던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순교자의 모범을 따라 자신의 신앙을 증거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의 주변에는 지난날과는 달리 신앙 때문에 피흘림을 강요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지난날의 평범한 신앙인이었던 순교자들이 보여주었던 그 큰 모범에 따라 우리의 신앙을 이웃에 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따뜻한 사랑으로 사랑이 메마른 새로운 빙하지대를 녹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순교의 정신은 묵은 과거의 일이 아닌 살아있는 오늘의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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