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구호를 우리만큼 높은 강도와 빈도로 외쳐온 민족도 없을 것이다. 이 사실을 두고 판단한다면 남북한은 다른 어떤 분단국가보다도 통일 실현을 향한 교류와 협력의 진전에서 앞서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데 안타까움이 있다. 현재 분단국치고 흩어진 가족과 친지가 만나기는 고사하고 편지 한 장 마음대로 교환할 수 없는 것은 남북한 밖에 없다.
한마디로 분단 극복의 현실적 과업에는 태업(怠業)하시면서도 엄살스러운 통일명분(統一名分)경쟁에만 열중해온 것이 남북한이었다. 다행히도 한국은 70년대 이후 그 급속한 경제성장에 힘입어 통일문제와 남북한관계에 관한 보다 실용주의적인 접근방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점진주의적 접근방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북진통일」의 냉전적 교조성으로부터의 이탈이며、 평화통일의 현실적 여건 조성을 위한 남북간 화해와 교류의 지향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환영할만한 변화였다. 그러나 평화정착과 신뢰회복을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이 점진주의 논리는 조급한 통일성취 욕구를 시원스레 충족시켜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분단고정」의 반통일적 발상으로까지 일각에서 매도되면서 명분상 수세에 몰리는 듯 했다.
이에 비하면 북한의 통일지상적 일괄주의는 그 위험한 함정에도 불구하고 통일에의 조금한 갈증을 풀어주는 데가 있었던 탓으로 일부에서는 대단한 호소력을 가졌던 것 같다. 그 실제 의도야 무엇이든 간에 「고려연방제」로 그럴싸하게 포장된 일괄통일방안은 그 나름대로 강한 설득력을 나타낸 것이 사실이다.
통일의 우선적 성취가 모든 문제해결의 열쇠이며 또 통일은 한꺼번에 당장해결 될 수 있다는 논리는 바로 그 일괄적 타격을 어렵게만 들고 있는 분단현실의 제약을 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있는데서 민족적 이상주의에 영합될 수 있는 소지를 늘리게 되었다. 길고 복잡한 과정에 관한 이야기가 생략된 채 통일 목표만이 반복적으로 강조된 것은 북한의 통일 지향성에 대한 과장된 인식을 유도했으며 그러한 인식은 한국내부의 통일논의 개방과 함께 더욱 팽배하게 되었다. 그러한 일부의 인식은 어떤 통일이든 선(善)이라고 믿는 비뚤어진 맹신을 낳았다. 문제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맹신이 북한공산주의 동조자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통일에 대한 감상적 기대를 가진 적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차츰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기야 거의 유일한 「냉전의 고도」로 남아있는 한반도의 비극적 분단현상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고 꿈에 그리던 통일이 일괄적으로 달성될 수만 있다면야 그런 반가운 기적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이념과 제도의 차이를 그대로 두고 당장 통일하자는 제안은 얼핏 듣기에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다. 혁명이라면 동족상잔이건 폭력테러건 서슴치 않았던 북녘의 거친 공산주의자들이 통일만 우선 해놓으면 자기들보다 훨씬 자유롭고 잘사는 남녘의 「부르조아 민주주의」거점을 「해방」시키고 싶은 충동을 얌전히 거두게 될 것인가. 통일을 열망하는 「남한민중」일지라도 자기가 사는 사회 안의 사회적 모순을 미워할지언정 항의하고 파업하고 또 타협하면서 자기들의 권리를 신장해 가는데 이미 맛을 들인 이상、 그런 자유를 무자비하게 말살하는 「프로레타리아 독재」의 광기를 옆에 두고도 불안해하지 않을 것인가.
또 어떤 사람은 말한다. 북한의 주장대로 연방제를 수용해서 우선 불안하게라도 통일만 해놓으면 당분간 부작용이 있을지 모르나 그 뒤에는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 당분간이란 것이 얼마큼 긴 세월인지는 모르되 연방제의 역사를 보면 줄잡아 10년은 훨씬 넘어야 한다. 해방 후 3년간의 처절한 좌우투쟁과정에서 치른 끔찍한 희생을 기억하는 사람이면 그 10여 년간에 또 얼마나 더 비참한 일이 일어날지 두려울 수밖에 없고 또 그런 일을 제쳐 놓는다 치더라도 준비 없는 통일 후의 극심한 갈등으로 그 통일국가가 보다 극악한 분단으로 와해될 가능성을 아무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아랍민족주의의 높은 공감 속에 이집트와 시리아가 세운 통일아랍공화국이 겨우 3년 반 만에 깨어져버린 선례를 구태여 들먹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점진주의 접근방법이 결코 반통일적 발상으로 매도될 수 없음을 확신하게 된다. 물론 그 점진주의가 분단현상에의 안이한 집착을 합리화하는 구실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십분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더 크게 경계해야 할 것은 통일논의를 격정적으로 몰아감으로써 일괄주의(一括主義)의 무조건적 수용을 강요하는 교조성이다. 더구나 그 교조적 논리의 제조자는 남한의 민주화를 요구하면서 지상의 가장 가혹한 독재를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민의 「지상낙원」을 자처하면서도 다른 공산국가가 다투어 서두르고 있는 인민을 위한 경제개혁을 거부하고、 한반도의 비핵지대화를 떠들어대면서 핵무기개발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는 위험한 위선자이다. 이 위선자의 실체에 눈을 감고 통일지상(統一至上)의 새로운 우상(偶像)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불안한 일이다 .분명히 말해서 실질적 교류의 점진적 축적 없이 통일의 일괄타결이 가능하다고 강변하는 것은 환상이 아니면 위계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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