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주님」에 관한 성서의 기록은 그 표현형식이 저자에 따라 서로 많은 차이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신앙개조라고 볼수 있는 바오로 사도의「꼬린토전서」15장3절부터 구절에 나타나는 기록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의 발현 사실로서 증언하고 전파한 것 같다.
사실 복음서에 나오는 「빈 무덤」에 관한 기록을 제외하면 그의 모든 기록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발현하고 그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지난날의 수난과 십자가의 수치스러운 죽음을 까맣게 잊고 오직 영광스러운 주님의 부활과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행복에 도취된 장면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가지 우리가 이 성서적 기록에서 주의하여 보아야 될 것은『누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뵈올 수 있었는가?』하는 점이다.
속인들의 생각으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외교인 총독인 빌라도나 자기를 능욕하고 죽이기로 음모를 한 재판장이나 바리세이들에게 나타나서『봐라, 바로 내가 너희가 죽인 예수요 메시아다』라고 했으면 문제는 쉽게 달라졌을 터인데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는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기를 충실하게 따르고 십자가의 절망속에서도 자기를 믿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즉 신자들에게만 발현하셨다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예수를 믿고 따르던 사람만이 부활하신 후에도 예수님을 뵈올 수 있었고 그와 같이 있는 행복을 가질 수 있었다.
예외라고 볼 수 있는 사도 바오로는 아마 그래서 자기를 주님을 뵈온 사람들 중에 열거는 하지만(꼬전15ㆍ8)마치『달이 차지 못해서 난 자와 같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신앙과 주님의 발현을 뵈올수 있는 것과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의 신앙인에게도 중대한 의의를 말해주고 있다.
인류역사를 통해 볼 때 구약시대에는 신앙인은 항상 하느님을 대월하고 살았다. 아브라함과 모이세와 같이….그리고 신약시대에 와서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말씀과 손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느님의 현존을 경험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후 신앙인은 오늘날까지 항상 주님을 뵈올 수 있고 주님과 같이 살아가는 행복과 위로를 간직하고 있다. 지금도 신앙인은 이웃에게서,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혹은 심지어 배신자들에게나 여러가지 사건속에서도 하느님을 대월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고 살아간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신앙의 본질이요 복음 전파의 핵심이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 신앙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주님을 뵈옵고 주님과 같이 사는 자들이고 영원히 부활의 행복을 간직하고 사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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