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을 상실한 현대
근대사상 거두급 주모자인 데까르트가『나는 신학자가 아니다. 나는 신학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했을때 그는 분명히 의식적으로 신학을 따돌린 것이다. 그리고 근대세계는「신학없는 철학」이라는 당초의 그의 목표를 훨씬 초과달성해서 그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현대세계를 출현시켰다. 데까르트 자신은 혹시 억울하다고 발뺌을 하고싶을 정도로 오늘날의 많은 사태에 대한 문책이 아직도 끝날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심판과는 아랑곳없이 최근에 우리 주변에서는「신학으로부터 평신도를 따돌리려는」주장을 내세우는 지도자가 있어서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는 풍설을 들었을때 참으로 벌어진 입을 다물수 없는 심정이 되지않을 수 없다. 현대의 「냉담」의 중요한 원천이 여기에 숨어있다고 생각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신학을 말하려는것이 아니다. 말할 자격도 없다. 『우리의 최대의 비애는 성인이 못되었다는 것이다. 』(레옹ㆍ블로와)라고 하듯이 현대의 최대불행은 신학을 상실했다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양학이 무엇인지 모르고 의사는 아닐지라도 어떤음식은 구미에 맞지않고 때로는 내 건강에 좋지 않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냉담」인가
아마 「냉담자」라는 말은 「열심자」에 대한 말일 것이며「열심」에 가지가지 이유와 정도와 종류가 있듯이(밀가루신자ㆍ선거신자같은 것을) 상기「냉담」도 그러한 것이다. 성소의 감소 사제의 환속 등도 그 일종이라고 본다. 또한 참으로 「열심」한 것이 드물고 어렵듯이 참으로「냉담」하기도 흔하고 쉽지는 않을것이다. 그러고보면 아무도「열심」과「냉담」에 대해서 자신을 가지기 힘들다. 철저한 무신론자라고 스스로 확신하는 자가 오히려 자칭 유신론자보다 더욱 신에 가까이 있다는 것을 도스토에프스키의 작품에서 우리는 실감있게 보았을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볼대 절대적인 무신론자가 없듯이(불가능하듯이)절대적인「냉담자」도 있을수 없으며 불가능하다고 하겠다. 물론 나는 죄와 악과 벌과 지옥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인간적인 현실의 깊이를 말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피상적이고 안이한「냉담」이라는 말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독선의 희생자들 정치적으로 사이비애 국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관제빨갱이」라는 것이 유행한 일이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주변에서 볼 수 있는 다대수의 소위「냉담자」들은 사이비「열심자」들의 그림자인 것이다. 자칭「애국자」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양민들이 울어야 했는가 독선적인「열심」때문에 얼마나 많은 선량한 영혼이 희생되었을까. 20세기초에 끄크 마리땡부처는
개종하면서『만일 천주께서 진리를 거름더미속에다 감추어 두었다면 나는 그 거름더미속으로 들어가지 않을수 없다』고 굳은 결의를 표명했다. 얼마나 용기있는 사람들이냐! 그러나 그와 같은 순교자적인 용기와 예언자적인 지혜를 가지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들은 그 진리에서 다만 멀어져간다. 그것은 거름더미로밖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속칭「열심자」들이 이 거름더미 노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일이다. 詩
샤를르 뻬기이도 그 당시에 신앙을 고민하고 있었으나 미사때는 성당에 가지 않고 아무도 없는 시간을 택해서 홀로 성당을 찾아 눈물을 흘리며 성체조배를 했다고 한다. 요즘 우리 주변에도 알게 모르게 이런 영혼들의수가 엄청나게 늘어가고 있지않을까 한다.
인간에 대한「냉담」
소위 「냉담」이란 결국은 천주께 대한 「냉담」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냉담」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귀의유감」인 경우는 극히 드물고「지성의 저항」인 경우가 태반이라고 보아야 타당할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 가슴을 울리는 대목이 많다. 구세주는 병든 자와 죄지은 자를 위해서 오셨고「좋은목자」이시고 그리고 마지막 십자가상의 말씀을 들을때 누구도 감히「냉담자」라는 랫델을 스스로 붙이고 나설수는 없을 것이다. 자기의 그림자가 딴 사람을 가리고 있지나 않을까 하는 것을 곰곰히 반성하며 신앙을 독점하고 천주를 사물화하지 않도록 겸허할 일이다. 소위「냉담」은 종교심의 후퇴가 아니라 더욱 참된 신앙을 위한 몸부림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실없는 고자세의 제스쳐로는 풀리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이「냉담」은 극복되어야 하며 화해없는 전진도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사랑이 없는 미사
마지막으로 실제에 있어서「냉담」은「미사」로 인해서 시작되고 「미사」로 인해서 극복된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 「미사」에는「아가페」의 뜻이 있는줄 안다. 그런데 요즘은「사랑」없는「미사」가 허다하다. 사랑없는 미사는 차라리 고문(?)같은것이 아닐까. 신학적으로 사목이라는 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알 수 없어도「내 양을 치라(養育)」는 말씀을「내 양을 치라(打)」는 뜻으로 알아들은 양이기 때문에 말없이 그저 사라져갈 뿐이다. 「냉담」은 말이 없다. 차디찬 심연이 있을 뿐이다. 어느 이단보다도 어느 존재보다도 무서운 생시체의 침묵이 백서의 제야가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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