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론 대동아전쟁을 일으켜 미·영을 비롯한 연합국과 힘겨운 싸움을 걸고 안으론 황국신민화정책의 올가미를 뇌우던 일제는 급기야 1941년말부터 종교계에도 신민화정책을 적용 「주교 갈아 치우기」에 나섰다. 이유인 즉 『왜 일본제국안의 천주교 교구장이 서양 사람이어야 하느냐』는 것 강시 서울 대구 광구 평양 원산 합흥 연길 춘천 전주 9개 교구중 외국인이 교구장직을 맡고있는 곳은 전주교구를 제외한 8개 교구였다. 일제는 먼저 한국교회의 얼굴겪인 서울교구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교구장은 빠리 외방 전교회 소속인 58세의 아드레아노ㆍ라리보 원주교(한국명 원형근) 진주만 기습이 있는 그해 12월8일 이후 중부경찰서 고등계 헌병대 도 경찰부 총독부 경무국 이때를 만난듯 명동 주교관을 드나들며 원주교의 사퇴를 강요해왔다. 내지(일본)는 이미 일본인 주교로 교체되었는데 서울은 교체하지 않느냐고 협박조로 대든다. 이때 원주교 비서로 있던 「미야마」신부(오기선 신부 창씨명 은퇴)가 가운데서 죽을지경이었다. 주교에게 사실을 숨기기엔 사태가 너무 심각하고 말하자니 『주교님 그만 두십시오』 하는것 같아 심히 난처할 수밖에. 『대세가 그렇고 천주의 뜻이 그렇다면 어떻게 되겠지요 두고 봅시다』하며 얼버무리는 것도 얼마동안ㆍ벌떼 같은 성화에 견디다 못해 조금씩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주교님, 일본서는 서양인 주교대신 일본주교를 앉히나 봅니다』 주교의 눈치를 보니 『한국에선 어림없다』는 표정. 그도 그럴것이 자신들의 피땀으로 1백여년 키워온 한국교회를 지금 와서 선뜻 내놓는다는 것부터 생각키 어려운 일인데 더구나 일본주교에게 넘긴다면 키워온 자신들의 체면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일제는 이미 태평양전쟁 전부터 모든 단체의 책임자를 일본인으로 교체할 계획아래 종교에 대해선 『일본기독교 종교단체법』이란걸 만들어 계획적으로 덤벼들었고 더구나 외국인이 책임자로있는 단체에 대해선 더욱 못살게 구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적국 또는 준적국 국민들이라 해서 평양교구를 맡고있던 메리놀회 신부 35명과 광주 춘천교구의 애란인 신부 32명을 경찰서 유치장에 잡아가고 으름짱을 놓기 시작했다.
사태가 이쯤되고 보니 당시 서울교구 신부들 간에는 일제가 날뛰는 꼴로 보아 필시 저희들 뜻대로 밀고 나갈 모양이라고 판단 어떤 조처가 있어야 겠다는 의견이 나돌기 시작했다. 『어떤 한국신부는 빨리 한국주교를 내어 인계하지 않고 어물댄다고 불란서 신부들한데 막 대들기도 했지요. 백여년동안 죽을 고생하며 키워 일본사람에게 넘겨준다면 말이 되느냐고 항의를 한 셈이지요』(오기선 신부ㆍ66)
몇몇 원로 한국인 신부들이 원주교에게 『사태가 이 지경이니 얼마동안 물러나 계시면서 후견인 노릇을 하시는 것이 어떠냐』고 사퇴를 완곡히 권유했지만 원주교는 그 특유의 『너무 걱정할거 없어… 뭐뭐』하는 대답만 할뿐 신통한 언질을 주지 않은채 그 해를 넘겼다.
서울교구가 일본인 주교를 맞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와 한국인 노장 신부들의 『빠리외방 전교회가 일본인 주교를 낸다면 차라리 옷을 벗겠다』는 항의가 분분한 가운데 새해를 맞아 며칠이 지났다.
1942년 1월3일 오전 주일 교황사절 바오로 마렐라 주교로부터 『서울교구 새 교구장에 오까모도 데스찌(罔本_治-盧基南) 신부를 임명한다』는 교황 삐오 12세의 전문이 날아왔다. 이어 11일엔 교황청 공문 두 통이 주일 교황 대사관을 통해 전해졌다. 한 통은 41년 12월20일자로 제출한 원주교의 사임을 수리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한통은 앞서 전달된 노기남 신부의 서울주교 임명 공문이었다.
공문은 또 노기남 신부에게 당분간 평양교구를 춘천교구 관할권까지 위한다는 내용을 첨가했다.
이로써 서울교구는 일본인 주교를 맞게 될지도 모를 위기를 넘기고 한국인 주교를 맞게 되었을뿐 아니라 노기남 주교는 최초의 한국인 주교로 임명되는 영광을 입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서울교구는 일본인들이 다른 트집을 잡을 시간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성성식은 뒤로 미룬채 보름만인 1월18일 오후 3시 명동대성당에서 교구장 착좌식을 거행, 한숨 돌렸던 것이다.
그러면 전격적인 교구장 교체는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원주교는 사태가 이미 기울어져가고 있음을 판단, 41년 12월20일 비서 오기선 신부를 「기독교 종교 단체법」 연구 명목으로 일본에 파견 주일 교황대사 바오로 마렐라 주교를 통해 자신의 사임을 전하게 하는 한편 한국교회의 실정을 알리고 한국인 주교 임명을 요청토록 했다.
오기선 신부는 25일 「도꾜」에서 교황대사를 만나 한국교회의 긴박한 상황을 두시간 동안 설명끝에 한국주교 임명 내락을 얻어냈던 것이다.
원주교의 이러한 비밀외교는 당시 부주교이며 명동성당 주임이던 빌모ㆍ우 신부조차 까맣게 모르는 속에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교구장직을 이임한 원주교는 곧 주교관을 떠나 구용산 신학교로 거처를 옮겼고 일대신자들에게 미사와 성사를 집행하며 작은 본당 신부직을 스스로 맡아오나 1948년 5월8일 대전교구장 서리로 취임, 정들었던 서울을 떠났다.
원주교는 그 후 1963년까지 대전교구를 맡아오다 그 해 9월23일 제2차 「바티깐」공의회 참석차 출국을 계기로 은퇴를 선언, 56년간 정들었던 한국을 조용히 떠나고 말았는데 이때도 사임을 몇몇 측근 신부에게만 알렸을 뿐이었다.
결국 한국교회를 한국인에게 인계함으로서 한국교회의 새로운 페이지를 여는데 주역이었던 원주교는 재임 중 철저히 지켰던 인사 비밀을 자신에까지 적용, 56년간의 치적들을 남겨놓은채 홀홀히 떠나고 말았는데 이때 그의 나이 80세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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