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 말 영ㆍ정시대의 학자 정약용(다산 1762~1836)은 문장과 경학에 뛰어나 일세의 석유(碩儒)로 경서역법ㆍ산수ㆍ경제 등 학문에 뛰어났으며 정조때 승지를 지내다 신유교난에 관련되어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 19년만에 풀려난 당대의 대학자다. 본보에서는 이번호부터 다산이 한국 가톨릭 교회사에 끼친 영향과 그의 빼어난 학문적 세계관 및 인생관을 연세대 홍이섭 교수를 통해 3회에 걸쳐 알아보기로 한다.
편집자 주
다산 정약용(1762~1826)은 영조말년에 출생 정조일대는 조연에 나아가 관료로서 행정적으로 바르게 즉 백성들을 억울하지 않게, 극빈속에서 건져 좀 더 편하게 살게 하기에 힘썼고, 1800년 권력분쟁으로 시끄러운 조연을 떠나 고향 마현(마재)으로 돌아갔다. 때의 권력의 분쟁에 천주교의 신봉을 이끌어 들인 벽파의 남인일파는 실질적으로 노론의 앞젭이 노릇을 한 셈이다. 다산은 이 분란의 기운이 짙어지자 정조의 어전을 물러 났던 것이다. 정치적 갈등에 사상적인 조건으로 말려들었던 「천주교 신봉」의 문제는 앞서부터 젖은 나무에 불붙듯 매운 연기를 내뿜어왔다. 정조 15년 신해(1791)에 권상렬(야곱, 윤지충 외도형)과 윤지충(바오로)의 천주교 신봉이 문제가 되기앞서 다산은 해미에 정배되었던 일이 있었다. 봄날의 해미에서의 외로움과 괴로움은 달포만에 풀려 조정에 왔으나 신해에 다시 신자로 몰려 이기경과 홍악안에게 시달림을 받는다. 그러나 다산은 학문을 인간적으로 합리적-과학으로 이해하기에 힘썼고, 그렇게 다루어 보다 실용의 학(學)으로 전개시키고 있었다.
그 첫례로는 나이 23세에 정조 어전에서 강의할때 중용의 해설이며 또 그때 정조에 대답하는데 있어 청년학구로 힘을 다하였다. 이 중용강의의 준비에 있어, 석연치 않은 대목은 광암 이벽에게 물었다. 이때 다산은 명례방(지금 명동일대)에 있었고 이벽은 수표구 부근(지금 수표구 교회가 있는 부근일것, 퇴계천고가로 밑…)에 있어 강의준비를 하다가 모르면 수표구까지 가서 물어서 이해하였다. 지금 서여유당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중용강의보」와 「맹자요의」속에 이 관계의 사정이 또렷이 기재되어 있다. 다산이 청년기에 이벽에게서 받은 유교경서의 이해는 물론, 바로 같은때에 이벽에게서 받은 천주교와 서양과학(이것은 중세적 색채를 농후히 지니고 있는 루네상스과이다. 다시 이것이 근대과학으로 전개된다. 이 점 주의할 일)에의 인도를 받는다. 다산은 후일 그의 자선묘지명에서 이벽에게서 서학(우리들이 서학이라고 하는 것은 천주교사상과 서양과학지식을 포함하는 것을 말한다)에 관해 얘기를 듣고 책자를 얻어보았지만 과학에 관한 것이었다고 하며 자기는 과학보는데 필요한 글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천주교에 관해서는 달리 언급함이 없다.
역시 사상적으로는 덮어두어야 했다. 다산이 서양과학 기술에 관해서 흥미를 갖고 또 거기서 얻은 지식을 그대로 현실에 적용하려고 하였던 것은 정조 16년(壬子) 수원성제를 작성한데서도 보겠다. 수원성 축성의 공정을 용이하게 하여 시간적으로 단축하고 함께 경비를 절약케 하였으며 노력을 삭감케 한 일은 그의 국가에 대한 정성의 소산이라고 하겠다.
이로 볼 때 서학에 있어 과학에 치중했다는 말도 그대로 믿을수 있으나 한편 그의 중용강의보나 맹자요의에 있어 그 해석에서 기독교적인 「애인」 정신의 표현을 보겠다. 이 애인은 유교의 애민에서 오는 것으로도 보겠으나 민이 아니라 「인(人)」으로 한데에 새로운 것을 보겠다 「인」은 즉기독교의 「인」이었던 것이나 그것을 명시할 수 없는데서 그대로 설명없이 유교경전 釋釋에 도입하지 않았나 한다.
함께 과학기술을 실용면에 이끌어들인 실천적인 이 정신도 「인」의 노력의 경감 함께 사물의 합리적인 이해를 갖게하지 않았을까 한다.
다산의 수원성제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청의 「기기각설」에서 축성에 관한 기술을 응용하는 것이었다. 기기각설은 고금도서집성에 수록되었으나 그 기술적인 것은 청의 학자와 서양신부와 합작하는 것이어서 서양축성의 모습을 수원성에서 찾아 봄도 원인이 거기있었던 것이다. 이제 다산을 볼 때 그의 학(學)과 사상이 단순하지 않았고 당시의 문물교류는 국내의 정치권력의 갈등 속에서 어떻게 국가적으로 또 합리적이며 또 유교적인 인민적인데서 기독교의 애인적인 것의 조화를 企하였든지 이러한 복잡한 형성과정에서 그는 한 관원으로 농민들의 실제생활을 어떻게 목도하고 생각했으며 그 실정을 어떻게 애인적인데서 개혁할려고 하였는지? 여기서 그의 정치-경제적인 학(學)-실천의 면을 보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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