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어린이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들이 어렸을 때에는 친구들 간에 맹세를 곧 잘하곤 하였다. 『천주께 맹세』『십자 긋고 맹세』등 상대방에게 내 말을 다짐하려고 이런 맹세를 하루에도 몇 번씩 하였다. 참 말을 할 때는 물론 거짓말을 할 때에도 시치미를 딱 떼고 그런 맹세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교리시간에 수녀님은 그런 맹세를 하는 것은 십계명 제2조를 범하는 죄라는 것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고해소에 들어가면 언제나 같은 죄 『맹세했습니다』를 되풀이 하였고 이것은 어린 마음에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제2계명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걸고 헛맹세를 하지 말라』. 이 계명은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계명이었다. 실은 그들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어느 시대에나 자기 행동이나 말에 대해서 진실을 보장하는 것은 사회가 유지되고 못되는 관건이 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맹세라는 것은 언제나 법적인 절차를 거치게 된다. 그 법적인 절차라는 것이 헤브레아인들에게는 거룩한 성전과 관련되었고 제관들과 관련되었다. 그렇게 하여 맹세자체가 일종의 종교행사였다. 맹세를 유효하게 하기 위하여 우선 하느님의 이름을 건다. 『하늘과 땅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이름으로』(출애20, 7) 하는 맹세는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한 만큼 맹세도 거룩한 것이어야 한다.
후대에 가서는 하늘을 두고 맹세하기도 하고 땅, 예루살렘성전, 그리고 자기 머리를 두고 맹세하기도 했다. 하느님과 관련된 모든 것이 맹세의 법적효과를 내는데 동원되었다. 심지어는 성조의 성기를 잡고 하는 맹세도 있었다. (창세 24, 2:47, 29)
이렇듯 거룩한 종교행사인 맹세는 상징적인 행동이 뒤따랐다. 맹세할 때에는 오른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맹세하는 내용을 묻는 제관에게『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혹은『아닙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민수5, 21:느헤10, 29). 유대아인들은 법적인 맹세를 할 때에 성서의 구절을 써 넣은「성구갑」을 지니고 맹세했다. 이것은 오늘날 법정에서 선서하는 형식으로 성서에 손을 얹는 것으로 남아 있다.
이렇듯 거룩한 맹세를 깨뜨리는 맹세파기행위나 위증은 곧바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행위일 수밖에 없다. 위증하는 맹세는 직접 천벌을 받는 것이고 그 천벌은 증언을 묻는 제관의 말 속에 포함되어있다. 그러니 위증에 대한 법적인 형벌은 정해져있지 않다.
가령 간음협의를 받는 여인을 제관이 심문할 때에는 위증여부를 가리는 방법으로 성수를 질그릇에 떠 놓고 성전마루 바닥에서 먼지를 긁어서 그 물에 탄 다음 여인을 야훼 앞에 세우고 묻는다.
『네가 유부녀로서 남편을 배신하고 몸을 더럽힌 일이 있느냐?』그리고 나서 그물을 마시게 하면서 또 말한다. 『만일 네가 위증을 한다면 저주를 내리는 이물이 네 뱃속에 들어가 배가 부어오르고 허벅지가 말라비틀어질 것이다』하고 말하면 여인은『좋습니다, 좋습니다』하고 대답한다.
그러면 제관은 그 저주내용을 글로써서 물에 씻고 그 여인에게 마시게 한다. 물을 마신 다음 아무 탈이 없으면 그 여인은 무죄이고 유죄일 때는 저주가 내린 대로 될 것이다(민수 5, 17이하). 그러나 실제로 그 저주대로 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시키고 그 벌칙이 애매한 맹세제도는 권력층의 남용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예수시대에 남용됐던 일들은 특별층의 권리를 부당하게 주장하기 위하여 맹세를 했고 빚을 갚는 일에 맹세가 끼어들었고 제3자를 짓밟기 위하여 맹세 한마디로 해결했고 남편이 아내를 속박하는 방법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맹세의 악습ㅇㄴ 사람들을 위선자로 만들었고 교활한 술법을 성행케 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런 폐단을 일소하는 강력한 한 마디를 말씀하셨다. 『아예 맹세를 하지말라』즉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불러가면서 사람 앞에 거짓맹세를 하지 말라는 뜻이다 우리가 기도 중에 입에 올리는 십계명 제2조이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양심이 있을 뿐이다 하느님 앞에 맹세까지 하며 거짓말할 필요가 있는가. 그분 앞에는 존경과 뉘우침이 있을 뿐이다.
유대아인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들먹이면서 하느님을 존경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크나큰 잘못이었다. 대인관계에서는 하느님을 들먹일 것 없이 그저 진실을 말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그렇다』라고 해야 될 때에는『그렇다』라고 하고『아니다』라고 해야 할 때에는『아니다』라고만 하면 그만이다. 하늘과 땅, 예루살렘, 성조, 성전을 들먹일 필요가 없다. 그 모든 것은 제 것도 아닌데. 자기 머리를 두고 맹세하는 것도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그것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인지 어디 제 것인가.
대인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간의 믿음이며 서로의 믿음은 서로가 진실하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 외의 것은 불신이며 불신은 위선에서 빚어진다. 사도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할 때에 두 번째는 맹세까지 하면서 예수를 모른다고 했고 세 번째는 천벌이라도 받겠다며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다. 그러나 그는 용서를 받았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