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전야 현상을 짙게 띠기 시작한 현대 문명생활속에서의 신앙생활은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치관을 실현하기 위한 무엇인가 새로운 방향 모색을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신앙생활이 이 싯점의 현실과 미래에 투영되어 주께서 주신 우리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서는 그 나름대로의 새로운 신앙생활이 실천되어야겠기 때문이다. 문예부흥 운동은 서양의 문명이 새 세기를 맞기 위한 준비였다는 점에서 그 가치성이 인정되는 것이라면 우리도 지금 마땅히 신앙의 부흥운동을 이르켜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16세기 전반의 이른바 신앙의 분열이 오히려 16세기 후반의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복음의 세계화에 공헌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라면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생활이 침체가 21세기의 새로운 신앙생활의 계기가 되어야만 하지않겠느냐 말이다. 문예부흥 운동은 인본주의를 중심으로한 희랍문화에로의 복귀를 뜻했다. 그래서 문예부흥을 재생이라고 일컬은 소이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 신앙부흥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도시대에로의 복귀를 통한 재생이 요청되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땅 극변에까지 나를 증거하라(사1ㆍ7)는 주님의 지상명령이 내려졌다. 사도들과 그 제자들은 이 지상의 존엄한 명령을 받고 생명까지 버려가면서 그 실천에 진력하였다. 사도들을 눈에 보이는 으뜸으로 모신 초대 교회의 그 신앙생활 모습이 간결하게 요약되었다(사2ㆍ42~47) 성신이 함께 하신 이 장엄한 지상의 至一至聖 至公의 단체는 철저하게 주의 이름을 중심으로 한 공동 생활속에서 사뭇 즐겁기만하여 서늘한 시절(사3ㆍ20)을 앞당겼고 모든 백성으로부터 인심을 얻어(사2ㆍ44)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사도행전을 보면 대개의 장절에서『성신을 충만히 받아』라는 구절이 산견된다. 성신이 그들의 생활속에서 철저하게 기준되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리하여 당시의 신자들은 만유를 새롭게 할 날을(사3ㆍ21) 눈 앞에 그리며 주님의 지상명령 실천의 첫 발을 세차게 시범하여 내디딘 것이다. 그러면 당시의 신앙생활의 특징인 공동적인 싱앙생활을 영신면과 육신면으로 나누어 고찰하면서 우리의 신앙부흥을 위한 당면문제를 평범한 일상 신앙생활에서 제기해 보고자한다. 첫째로 영신면에서 보면 사도들의 교훈, 영성체, 기구에 항심하였음을 들 수 있다. 교우들이 사도들의 교훈과 면병을 나누어 영함과 기구하기에 항심하매 모든 사람이 두려워했다(사2ㆍ42~43)ㆍ사도의 교훈이 그들의 명오를 열어 우주관 인생관이 확립되어 생활기준이 뚜렷하였다.
그러므로 삼구의 유혹에 흔들릴 까닭이 없었다. 규구를 저들에게 가르쳐주어 지키게 하니 모든 교회의 신덕이 과연 견고하여지고 수가 날로 성하였다.
(사16ㆍ4~5) 주님의 계명으로 철저하게 무장되어 아무것에도 굴하지 않는 건전하고 발랄한 그리고, 보람에 찬 생활은 모든 이에게 두려움이 되어 만번 지당하였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우리들의 실정은 어떠한가? 뚜렷한 인생관이 서 있는가? 우리의 모든 생활이 신앙이라는 가치관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는가? 21세기의 문명에 대처하여 주의 지상명령을 실천하기 위하여 우리 안에서 성신七은이 총동원되고 있는가? 우리는 너무나 연약한 육신때문에 세속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는 것이 속일수 없는 실정임을 고백할수 밖에 없는 설움이 있음을 어쩌랴! 사제의 강론과 교회안에서의 교리강화와 교회의 모든 홍보활동이 우리의 명오를 열고 현 세기에 대처할수 있는 인생관 확립을 위하여, 어떻게 어느정도로 우리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가를 살펴봐야겠다.
무엇에도 흔들릴 수 없는 인생관은 항심하게 노력하는 자에게만 부여되는 선물일 것이다. 교회의 예전에나 거의 의무적으로 참석한다 해서, 스스로 이룩되는 것은 아니리라.
다음으로, 영성체-신령한 음식이다. 당시의 의인들은 이신령한 음식을 매일 영하는 교우들에게서 하느님의 특별한 생명력이 부여되고 있음을 보았다. 또한 하느님이 주신 이 거룩한 천상의 음식을 공동으로 영함으로써 맺어지는 하나의 몸하나의 공동체, 이 몸, 이 공동체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이룩되어 성신의 충만한 사랑으로 삼위께서 일체이심 같이 하나가 됐으니, 뿔뿔이 흩어져 살던 당신의 의인들에게 두려움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음도 당연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속에서 영성체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할 단계다. 사도들은 주를 의지하여 굳세게 전교하매, 주께서 저들의 손으로 영적과 기묘한 일을 행케하셨다. (사14ㆍ2). 영성체로 하느님과 일치된 사도들은 그야말로 예수님의 분신(分身)이요, 지체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의 영성체는 때로는 예전상의 어떤 한 부분일뿐인 듯한 인상마저 있는 느낌이다. 영성체를 위한 적극적인 참여보다도 주일을 지킨다는 의무(?)에 이끌리다 보니 영성체를 하게 되는 듯한 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성체를 통해서만 우리의 생명력이 주 안에서 자랄 수 있고, 영성체를 통해서만 주의 이름으로 우리는 생활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영성체에의 불참은『찢어져 말라진 포도가지』임을 자처, 체념하는 소행이다. 바오로의 배(사27ㆍ13-26)밖에 있는 자는 거센 파도에 묻혀 그 생명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요, 이는『초대된 거룩한 잔치 상』밖에 있는 이들은 어미닭품을 벗어난 병아리 같아서 21세기의 세찬 문명의 속된 소리개가 그 생명을 노릴 것이 분명하나 오늘날 우리들의 영혼은 후천적으로 위장이 약해졌다. 위장이 약한 자는 식욕이 없다. 식욕이 없는 즉 영양실조로 그 생명을 잃을뿐이다. 우리 영혼의 위장이 냉하기 때문이다. 육신도 위장이 차면 좋지 않다던가? 우리 영혼의 위장을 뜨겁게, 뜨겁게 보호하여 우리의 거룩한 식욕을 북돋우어야 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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