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회는 지난해 8월 현재 빠리외방 전교회 신부요양소에 계신 元주교님을 방문하고온 오기선 신부를 통해 元주교의 근황과 해후담을 들어보기로 한다.
지난해 8월 프랑스를 방문할 기회를 얻은 나는 어쩌면 내 생애의 마지막 해외여행이 될지도 모르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빠리」 남쪽에 있는 빠리외방 전교회 성직자 요양소로 원주교님을 찾아 뵙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원주교님이 한국을 떠나신지도 어언 10년이 되고보면 향년 90세로 한적한 생애를 보내고 계신 원주교님도 많이 변하셨으리라.
8월5일 빠리외방 전교회 본부를 나서 원주교님이 계신다는 「몽베동」(MONBETON) 요양소를 찾아 나섰다. 「뚤루스」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몽동방」(MONTAUBAN)역에 도착하니 오후 3시다.
역에서 차로 3km쯤 달려 요양소에 도착하니 전공주본당 주임으로 계시던 「빠이에방」신부님이 2층창에서 『뻬르ㆍ오비엥베뉘』(오신부 환영합니다)하고 두손을 흔들어 반가이 맞아주신다.
「빠리」를 떠나기 전 전화로 방문을 알려드렸는데 반기시는 모습이 꽤 기다렸나 보다.
잠시 반가운 해후의 사연을 나누고 원주교님 방문을 두들겼다.
뛰는 가슴을 누르며 잠시기다리자 이윽고 방문이 열리며 꼭 9년만에 뵈옵는 원주교님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야말로 홍한백발이시다. 9년전 대전서 마지막 작별인사를 드릴때나 별 차이가 없으신 모습이다. 오히려 더욱 건강해보였고 탐스런 수염도 그대로이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주교님은 다리에 힘이 없어 보행에 지장이 있을뿐 아직 건강은 좋으시다니 퍽 다행한 일이다. 덥썩 주교님의 손을 잡는 순간 말할수 없는 반가움과 함께 지난날 주교님과의 길고도 긴 사연이 한꺼번에 되살아나 무슨말씀부터 드려야할지 그저 멍할뿐이었다. 주교님도 역시 내 얼굴만 쳐다보실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신부님이 나를 찾아줄 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는데… 정말 꿈만 같아요. 실로 뭐…』
주교님이 그 독특한 한국사투리로 먼저 말을 꺼내신다.
『주교님 저 역시 이것이 생시인지 꿈인지 오락가락합니다』
『오신부님이 세상을 한바퀴 도는 일이 좀 늦으셨지요. 그래 우리 일터이던 대전교구는 지금 어떻습니까?』
『네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교구는 지금 장족의 발전을 해가는 셈이지요?』
자애깊은 어머니는 자식이 크게 성장해도 『얘야 문지방 잘넘어 다녀라. 넘어질라』 하신다던가.
원주교님은 그가 1907년 5월23일 한국에 첫발을 딛으신 이후 1963년 9월23일 말없이 떠나시기까지 56년간 이 땅에서 검은 수단속에 청춘을 불사르며 가장 어려운때 한국교회를 맡아 오다 후배들에게 물려준지 어언 10년이 다 돼가건만 그 표정속에 자식을 걱정하는 어버이의 따뜻함이 서려있음을 느낀건 내가 주교님을 오래모시고 있던탓 때문만은 아니리라.
주교님은 자신이 맡았던 서울ㆍ대전교구 사정은 물론 그밖에 다른 교구 사정까지도 자세히 묻고 나의 대답에 귀를 귀울이셨다. 『주교님은 귀국하신 후 누님과 함께 계시는줄 알고 있었는데 언제 이곳으로 오셨습니까?』 『누님이 작년에 90이 넘어 돌아가신후 조카들이 있기는 하지만 어디 누님만 하겠어. 그래 다른 신부님들 권유도 있고해서 결심끝에 이 요양원에… 난 이제 죽으려고 여기 와 있지요』
늘 한국땅에 묻히겠다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되살아나 순간 마음이 아파온다. 주교님은 이미 90을 바라보는 고령이시건만 기 기억력은 예나 지금이나 비상하시다. 심지어 서울 대전교구의 어느신부 어느교우는 지금 어떻게 됐으며 성사를 잘 받드냐고 물으시더니 지금 아무개 아무개 교우가 냉담해 있다고 하니 귀국하면 그 사람들 상태를 자세히 알려달라고 부탁을 하신다.
나는 1939년부터 42년까지 3년간 주교님 비서로 있었고 대전교구로 가신후 15년동안 교구장 비서로 있었던 관계로 각별한 정이 있어 밤가는줄 모르고 대화를 이어갔다.
이곳은 빠리외방 전교회 소속 은퇴신부들이 요양하는 곳으로 1880년 한 귀족이 기중한 커다란 건물안에는 현재 20여명 노은퇴 신부들이 쓸쓸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대개 60세에서 90에 이르는 노신부들이 추억을 되새기며 살고있는 건물 앞 10m숲속에는 230여 명의 주교신부들이 잠들어있는 묘지가 있었다.
바로 이 건물안에서 일생을 마치면 길건너 숲속에 몇명 영면의 터를 얻어 옮기는 것이다.
원주교님 방은 바로 묘지가 내려다보이는 2층에 있었다. 4평 넓이의 마루방에는 작은 책상앞에 앉아 묵상책을 보며 소일하신단다. 『난 내년 2월4일이면 만90이 되는데 오신부님 그때 내가 잔치를 크게 벌일터이니 잔치 먹으로 오면 참 좋겠다』
내 우울한 심정을 바꾸시기나 하려는듯 주교님은 흥안을 펴고 애써 웃어보였다. 『네 천주님이 허락하시면 되겠지만 천주님은 그런 기적을 자주 안주시지 않습니까? 이번에 뵙게 된 것도 기적같은데요』 『글쎄말이야 실로…뭐…그랬으면 좋겠는데』 『대신 제가 주교님을 다시 한국으로 모시면 어떻겠습니까』 『어려운 이별을 또 어떻게 하라고… 9년전 한국을 떠날때 이별의 고통이 너무 심했어. 그러나 난 하루 한시도 한국을 잊을수 없어요. 내게 영세ㆍ견진ㆍ혼배성사 받은 모든 교우들 한시도 잊을수 없어요. 가거든 내가 떠날때 문안고루 전하지못하던 교우들에게 내가 문안 전하더라고 전해줘요. 나는 여기 죽으러 와있어요. 저기 보이는 묘지가 나의 마지막 안식처예요』
묘지를 가리키는 주교님의 홍안에 한줄기 눈물이 흐른다.
이튿날 아침 7시 원주교님과 나는 2층 성당에서 정말 마지막이 될 미사를 봉헌하고 이별을 고했다. 주교님ㆍ방신부ㆍ대구교구에 계셨던 송뜨게보 신부의 전송을 받으며 대문을 나서니 왈칵 참았던 눈물이 쏟는다. 『주여, 저들의 여생에 평화를 주소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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