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기도ㆍ영성체를 통하여 천주성삼과 일치됐으니 하느님께서 기꺼이 들어주실 기도의 소리를 들은 외인들은 혼비백산하도록 그들을 두려워 하였음이 지당하다.
그러나 특히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구절은 이「항심」이라는 단어다. 여기 사도행전에 「항심」하였으므로 모든 사람이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앙 생활이란 일시적인 감정이나 흥분이나 어떤 경앙된 표현일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 영원하시니 우리의 신앙심도 영원해야 된다는 결론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끝까지 항구한 자는 이에 구원을 얻을 것이다(마ㆍ10ㆍ22)라고 주께서 가르치신 것이 아닌가? 주께서는 또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준다(마6ㆍ8)고 가르치신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다. 대화의 효과는 상호간의 교류에 있다. 어른과의 대화는 나를 어른께 드리고 동시에 어른의 듯을 받드는데 그 가치가 있다. 따라서 대화의 두절은 인연을 끊음이요 하느님과 인연이 끊긴다는 것은『말라져 아궁이에 들어갈 가지』일 뿐이다.
따라서 기도는 주께서 명하신대로 간단함이 없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들의 기도생활의 소홀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가? 일상 생활에서 하는님의 지도와 성신의 사랑이 없는 고립된 생활을 결과했다. 『신은 죽었다』던 기도없는 인생의 현실과 미래에는 절망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생명 유지를 위하여 『떠가는 지푸라기』를 잡고 허위적 거리나 잔인하도록 철저하게 서글플뿐이다. 군중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소외감을 느끼고 버림받은 외로움을 느껴가며 산다는 뜻이리라. 『주의 잔칫집 뜰안』에 있으면서도 고독을 느끼는 소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하느님과의 대화가 없는 까닭이다. 열어주지 않음을 탓하지 말고 우선 두드리고 문이 열리기를 항심을 가지고 기다리라.
다음으로 문제되는 것은 기도의 지향이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산헤드리움」에서 풀려나온뒤 교우들은 감사의 공동기도를 드렸다.(사ㆍ23-31) 「감사의 공동기도」,되사겨볼 구절이다. 감사의 기도였다는 점이 그렇고, 공동의 기도였다는 점이 그렇다. 「감사의 기도」이것은 기도의 지향점을 제시함이요, 「공동기도」이것은 그 방법을 암시함이 아닌가? 또 다른곳에서는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가 순교하자 교유들은 요한의 모친 마리아의 집에 여럿이 모여 기도하였다.(사 12ㆍ12)성당에서의, 가정에서의 우리의 기도의 지향점이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그 방법은 어떠해야 하겠는가? 그것은 감사와 교회를 위한 기구이어야 하고, 그것은 또한 몸으로 아니면 적어도 마음으로라도 모든 성인의 통공에 입각한 공동의 기도여야만 하겠다. 요구만의 기도는 천주를 시험함이요, 완전한 개인의 기도는 미신일뿐이다.
성당안에 모여있는 이들의 기도가 각자 나름대로 어떤 주께서 그안에 계실 까닭이 없고, 주께서 계시지 않은 기구는 무효일 뿐이니, 이는 기도가 아니요, 시장의 소음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기도가 어딘가 미신스럽게 흐르고 있는 원인과 현상을 반성해야 겠다. 21세기에 대처할 수 있는 기도는 마땅히 근본적으로 어떤 혁명이 있어야겠기 때문이다. 사도시대 모든 이가 두려워한 점은 바로 이 감사와 교리를 위한 공동의 기도에 있었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되겠다. 이러한 기도가 항심할 때 주께는 우리와 더불어 영원히 계실것이다. 어느본당엘 가나 구체적으로 또는 관념적으로의 어마어마한 냉담자의 숫자는 교회가 모든 이에게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경멸의 대상이 될 지도 모를 우리의 냉정한 현실은, 닥쳐올 아니 닥쳐오고있는 공포의 세기 문전에서 마땅히 커다란 혁신의 사명감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모든 믿는 자들은 일심으로 모여있으며 가진바 모든 것을 공번되이 쓰니…, 모든 백성에게 임심을 얻었다 (사2ㆍ44-47)앞에서는 영신면에서의 공동체에 대하여 생각해봤다.
여기에서는 사도교회의 유신적인 면에서의 공도체에 관하여 보기로 한다. 모든 믿는 자들은 일심으로 모여있다고 했다. 「일심으로」-믿는 무리의 마음이 하나이 되고 뜻이 하나이 됨이 요셉의 선행을 인도했다(사4ㆍ22) 「일심으로」-,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마음이 하나이요, 뜻이 하나임을 뜻한다. 마치 천주께서 하나이심같이 주의 모든 지체의 마음과 뜻이주안에 하나이어야 한다.
『일심으로 모였다』는 말은 반드시 물리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영신과 모든힘으로 네 주 천주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반드시 너의 자신을 분열시키지 말고, 너의 모두를 가져 하느님을 섬기라는 뜻에만 국한할 수는 없다. 우리 신자 단체가 하나이 되어 한마음 한뜻으로 하나이신 하느님을 공경해야 한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음을 상기해야겠다. 하느님은 분열의 주가 아니요, 삼위일체이신 사랑과 평화의 주님이시다. 우리 어찌 나누일 수 있는가? 사도교회의 이 시범은 그 정신이 2천년을 흘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사도전래』라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 본당 우리 교구, 우리 사도직 단체를 돌아보자. 하느님을 공경하고 주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한다는 지향이라면서도 과연 우리 믿는 이들의 마음과 뜻이『일심으로 결합』되어 있는가?
극단의 이야기로, 모든충성이 교회에 바쳐지기보다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나팔을 불고 사사로운 영광이나 명예나 체면이 걸핏 부각되기쉽고, 인류의 구원이라는 명제에 보다는 사사로운 어떤 이익이 앞장서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공동이있다. 그러다보니 나로 인하여 다른 이가 넘어지고 내 그림자로 인하여 다른 이가 태양의 볕을 쬐지 못하는 수가 있지 않은가? 자기 영혼을 구함은 나의 지상명제임엔 틀림없다. 사도 바오로께서도 남의 영혼은 구하고 내 영혼을 구하지 못할까 두렵다고, 그렇기 때문에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나의 영혼을 구함이라는 과제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향하여『남은 구해주고 네 몸은 못구하는구나?』하고 비웃던 악당들의 아우성속에 흐르고있는 세속적 내지 현실적 이익과 혼동되고 있다면 어쩔 것인가?
신앙의 진미는 내가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고, 없는 것 같으면서도 있다는데 있는지도 모른다. 「나라의 융성이 발전의 근본」이라고 세속에서도 가르친다. 교회밖에서의, 그보다도 교회없는 신앙 생활이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교회를 세우신 뜻이 다만 당신 교리를 이 교회안에 보존하고 양을 다스리기 위함에만 있다고는 못한다. 인류는 마땅히 이 교회 안에서만 구원할 수 있도록 안배하셨기 때문이다.
3위1체의 오묘한 도리는 곧, 자모이신 교회안의 신자 일체를 전제하여 이해되는 것이다. 너무나 우리들의 현실은 모래알 같음을 절감한다. 천주교회가 냉정하다는 평이 있어서가 아니다. 엄숙하다 보면 그렇게도 남에게는 보일 것이니, 굳이 탓할 바도 아니다. 옛날, 천주교 요리문답 첫 조목에 인생의 목적이『천주를 알아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함』으로 돼있는 것을 액면 그대로, 문자만의 해석으로 철저하게 실천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인가?
자기영혼을 구한다는 목적만 알았지 그 방법을 배우지 못한탓인지 모른다. 신앙상으로 영신상으로 사람마다의 사이에 그어진 38선은 세속적인 이익추구로 그럴듯하게 일체 인양하다 하여 캄푸라쥬가 되고 해소되지는 못할 것이다. 천주는 사랑이시니 사랑에 머무는 자는 천주께 머물고 또할 천주께서 저 안에 머무신다(요한1서4ㆍ16)고 하셨다
성신의 사랑이 물이 되고 우리의 신심이 시멘트가 되어 이 강변에 모래는 결합이 되어야겠다. 공포의 세기앞에서의 급선무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하여 이 흩어진 모래가 날마다 성전에서 일심으로 결합되어있게 될 때 우리 자모이신 교회의 앞날에는 새로운 주님의 섭리가 안배되실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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