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문제는 누구에게나 일단 민족문제로 인식된다. 따라서 원래 함께 동고동락하던 한 민족이 원치 않은 가운데 나뉘어 살며, 서로를 안타깝게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는 현재의 그릇된 상황을 타개해야 되겠다는 민족적 정서가 항상 그 저변에 깔려 있다. 그러기에 이 나라 사람이면 누구도 내놓고 「반통일」(反統一)을 외칠 명분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가 일단은 소박한 민족주의자들이다.
그러나 남북한의 현실로 돌아와서 다시 생각해 볼 때, 상황은 그리 간단치 않다. 남북이 한때는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생사를 건 싸움을 치렀고, 아직도 그 대결구조의 큰 틀이 그대로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양쪽 주민들도 반세기 가까이 떨어져 살며 서로 판이한 체제에 익숙해 있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많은 이들은 스스럼없는 사람끼리 모이며, 『통일, 통일하는 게 괜한 소리지, 통일이 어떻게 돼』하며 통일논의의 비현실성을 매섭게 꼬집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소박한 현실주의자들이다.
통일은 이처럼 우리에게 꿈이며 또 현실이다. 꿈에 취하여 현실을 외면하면 무모한 통일지상주의자가 외며 현실에 착하여 꿈을 잃으면 우리민족은 천형(天刑)처럼 짊어진 분단이라는 면에서 영영 벗어날 길이 없다. 따라서 꿈을 쫓되 현실을 잊지 않는 슬기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통일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영토적 통함을 뜻하는가,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나뉜 민족이 하나로 마음을 합치는 새로운 국민형성의 과정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의 총체적 과정인가? 분명한 것은 우리가 희구하는 통일은 단순한 영토적 통합이나 정치적으로 단일의 국가를 형성하는 작업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온 민족이 화해와 일치 속에 한민족으로 다시 태어나고 참된 의미의 국민형성과정이다. 이러한 국민형성과정을 거쳐 그 논리적 결과물로서 나타난 영토적, 정치적 통합은 정당성을 인정받을 뿐 아니라 강한 생명력이 있다. 그러나 민족적 동질성을 복원하는 심리ㆍ문화적으로 창출된 통일국가는 그것이 성취한 외형적 통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에 있어 우리 민족에게 분단 상황 이상의 고통과 질곡을 선사할 수 있다.
통일은 무엇보다 평화적으로 추구되어야 할뿐더러, 통일된 상태 또한 우리에게 지속적인 평화, 적어도 분단 상황보다 질적으로 월등한 참된 평화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이러한 평화 성취적 통일과정은 매우 조심스럽게, 또 인내와 정성을 가지고 추진되어야 하며 한쪽 당사자만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쌍방적 협력의 산물이어야 한다. 또 필요한 경우 이웃 나라들의 도움이나 보장이 필요할 수 있다.
다음 새롭게 형성되는 정치공동체는 적어도 삶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은 적어도 일정 수준 이상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복지를 선사할 수 있어야 한다. 대체로 서방세계는 그간 자유에 과도한 역적을 두어 왔는데 비해 공산세계는 지나치게 평등에 집착해 왔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보다 자유롭고 다른 이에 비해 크게 뒤지지 않으면서 더 높은 수준의 복지를 누리기를 갈망한다. 따라서 역사상 우선 자유와 평등의 두 사회가치 중 하나의 가치만 편중되게 추구하는 체계가 성공한 예가 없다. 자유방임주의를 신봉했던 19세기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심화시켰는가 하면, 20세기에 들어와 여러 곳에서 진행된 사회주의의 역사적 실험은 겨우 하향적 평등만을 실현시켰을 뿐,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크게 유린했다. 이렇게 볼 때, 현재 남과 북의 정치체제는 보다 높은 수준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복지를 이룩하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자본주의냐 혹은 사회주의냐 하는 양자택일적 발상에서 벗어나, 두 체제는 더 많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복지를 성취하기 위하여 뼈를 깎는 자기쇄신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북한의 경우, 민주주의적 정치과정과 개인적 자유와 인권, 그리고 보다 풍요로운 삶이 보장되어야하며, 남한의 경우 무엇보다 평등의 제고로 체제 내적갈등과 아픔이 크게 해소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은 보다 개방적이며 인간화된 사회주의체제로, 그리고 남한은 자유와 더불어 배분적 정의를 강조하는 서구선진형 복지국가로 발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양 체제의 자기쇄신과정은 높은 차원에서 두체제의 동질성을 높여 주리라 본다.
위에서 우리는 통일은 이상과 현실,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적 조화 속에서 추구되어야 하며, 그것은 또한 국민 형성적, 평화 성취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우리가 추구하는 진정한 의미의 통일, 다시 말해 민족공동체의 형성은 바로 이러한 총체적 과정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위하여 남북한 간의 평화구조의 정착, 남북한 간의 다방면적 교류, 그리고 무엇보다 양 체제의 뼈를 깎는 자기 쇄신이 요구된다.
이중 어떤 것이나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양 체제의 자기쇄신노력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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