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구원
이스라엘은 출애급 사건을 계기로 에집트의 강대 세력과 자연의 위력을 제압하는 하느님의 구원능력을 강하게 체험하였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이 구원 행위가 그분의 놀라운 창조행위로 이해되었다. 그들은 에집트로부터의 해방과 정에서 하느님을 구원주로 그리고 나아가서 창조주로 체험하였으므로 신과 인간의 관계 및 창조행위를 성적(性的)차원이나 자연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해방 및 계약체결과 같은 역사적이고 정치적 차원에서 이해하려 하였다. 그리고 예언자들의 세계관에 힘입어 세계ㆍ우주에 대한 안목을, 또한 지혜문학의 영향으로 인해 자연현상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됨으로써 자연을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구체화하였다. 지혜문학 작품들과 창세기의 창조에 관한 대목들은 비교적 후대에 형성된 창조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산물들이다. 그 대목들에 의하면 야훼가 당신의「입김」 과 「말씀」 으로써 아주 쉽사리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셨다.
『야훼의 말씀으로 하늘이 펼쳐지고 그의 입김으로 별들이 돋아났다』 (시편33, 9). 어둠이 깊은 혼돈의 물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는데 하느님이『빛이 생겨라!』말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창세1,2~3). 구원주 야훼가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때 제압하였던 홍해의 바다가 창세기에서는 창조이전에 온 우주를 뒤덮고 있던 혼돈의 물로 표현되었다.
창조는 구원 이전의 단계가 아니라 구원과정의 일부분으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최초의 구원사건이다. 천지의 창조는 역사 한 가운데에서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최초위업이다. 창조는 영원하고 전등하신 하느님의 자발적 행위이다. 세계는 무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이 세계와 동일한 본질을 가진 분, 이 세계에 속한 분이 아니라 이 세계와 「근본적으로 다른」분이시다. 창조주 하느님은 초월적이고 살아계시며 거룩하시다.
초월성
다른 신들은 세계에 얽매여 있는 존재이지만 야훼는 세계의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우주와 지역과 시간과 민족에 속박되어 있지 않다.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역사의 길을 걸으시지만 그 궁극 목표는 만백성의 구원이다. 그분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므로 우주에 메여있지 않으시다. 이 초월성은 그분이 어디에든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당신 생각을 벗어나 어디로 가리이까』 (시편139,1~10). 시작이 없어 시간에 매이지 않는 하느님은 만사에 시작을 마련하신다. 『당신 앞에서는 천년도 하루와 같아 지나간 어제와 같습니다』 (시편90,4). 『나 야훼가 이일을 시작하였다. 마지막 세대에 까지 이 일을 이끌어 나갈 것도 바로 나이다』 (이사41,4).
야훼의 초월성 때문에 그분을 세상의 어느 피조물과도 동일시하려는 시도, 특히 형상의 제작이나 숭배가 엄금된다.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 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이다』 (출애20,4이하 : 신명5,8이하). 초월적인 하느님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이 세상 안에는 전연 없기 때문에 형상으로 형용될 수도 표상될 수도 없다. 『너희는 하느님을 무엇과 닮게 할 것이며 무슨 닮은꼴을 그분 곁에 놓겠느냐』 (이사40,18). 형상을 통해서건 이름을 부름으로써건 여하한 방법으로도 인간은 하느님을 조종할 수 없다. 하느님은 전적으로 자유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신상금지의 근본 동기는 야훼의 초월성을 긍정하는 것이고 그분의 절대적 자유를 온전히 존중하는 것이다. 하느님 신앙은 이 절대적 자유를 승복하는 것이다.
충만한 생명
이스라엘은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는데 이는 하느님의 충만한 생명, 생동력이 그분의 가장 깊은 본질임을 시인하는 것이다. 이생명은 어느 것에 의해서 심지어 죄에 의해서도 위축되지 않으며 너무나 풍요로우므로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 증대될 수도 없다. 하느님 안에는 생명이 넘쳐흐르므로 활력에 차있고 당신 생명의 「기운」을 다른 존재에 불어 넣으신다. 분노, 격정, 아픔 따위와 같은 하느님의 감정 변화를 묘사하는 이른바 신인동형(神人同形) 수법은 하느님의 생명력, 인격적인 활력과 충만한 생명력, 곧 내적으로는 고도의 활기가 가득 차 있고 외적으로는 모든 것을 초월하고 지배하는 불굴의 활력을 지니신다. 살아계시는 하느님이 「진흙」에 당신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어 살아있는 「아담」이 되게 하셨듯이 한줌의 흙이 된 「인격」에 역시 그 기운을 불어넣어 다시 살리실 것이다.
부활신앙은 살아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인간의 사후 또는 세상의 종말에 적용시킨 결과이다.
성성(聖性)
거룩함을 가리키는 히브리 단어의 근본 뜻은 「떨어져 있다」 「전적으로 다르다」 이다. 속된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신 하느님은 거룩하시다. 『나는 나의 거룩함을 걸고 맹세한다』 (아모4,2). 이름까지도 거룩하신 하느님은 인간이나 세상에 속한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으시다. 『전적으로 다른 분』 (절대타자) 이시다. 인간이 거룩해지는 것은 그의 선업으로써가 아니라 하느님과 가까워지는 것, 그분의 영역 안에 들어감으로써이다.
이사야서에서는 「스랍」들이 하느님에 대해 『거룩하시다』고 세 번 외친다 (이사6,6). 야훼의 압도적 드높으심, 눈부신 순수성, 전율과 부복을 강요하는 영광을 뜻한다. 인간이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 체험하게 되는 유일한 반응은 비천한 피조성과 나약함과 죄스러움의 인식이다.. 인간을 전율케 하여 비천함을 고백하게 하는 하느님의 속성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을 끄는 힘이기도 하다. 거룩함의 속성은 야훼가 비할 데 없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나는 거룩한 신으로 너희 가운데 와있지만 너희를 멸하러 온 것이 아니다… 내가 내 백성을 저희 집에 살게 하리라』 (호세11,9ㆍ11). 거룩함은 하느님이 속된 인간을 당신에게로 끌어당기시어 정화시키는 힘이다.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느님을 제 눈으로 뵙고 『죽었구나!』하고 부르짖자 스랍 하나가 뜨거운 돌을 그의 입에 대고 말하였다. 『너의 악은 가시고 너의 죄는 사라졌다』 (이사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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