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은 복자 김대건 신부님이 탄생한지 1950년 순교한지 125주년 시복된지 45주년에 해당되는 뜻깊은 해다. 이 뜻깊은 해를 맞이하여 서울 대교구를 위시해서 전국적으로 그 님의 시성운동이 추진되게 된 것은 비록 만시 지탄은 있지마는 지극히 당연한 처사이요, 한국 80만 가톨릭 신자의 지상염원이던 만큼 그 시성의 결과가 하루빨리 이뤄지기를 기원하면서 우리모두 김대건 신부님이 성인이 되실 얼만큼의 자격과 성덕을 갖췄었는지 살펴봄이 의의가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먼저 그 님의 일생기를 대강 알아보고 다음 그 일생의 공적중 탁월하고도 초인간적 위대성을 몇가지 간추려보기로 한다.
사람의 한평생을 대략 7ㆍ8십년을 잡으면 그 님의 일생이란 불과 25세란 짧은 동안이었다. 그나마 15세까지의 유ㆍ소년기를 빼면 불과 10년인데 이렇게 짧은 동안에 인간 김대건으로서 너무나 위대한 공적을 쌓았고, 신앙인 김 안드레아 신부로서 너무나 탁월하고도 성스러운 업적을 과시하였다.
▲그 님의 일생
신분을 보면 왕가의 후예로서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은(6명) 순교자를 낸 유명한 가문 출신이다. 교회편으로 보면 우리나라의 수선사제이면서 유일한 순교복자 신부였고 국가와 민족편으로 보면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서 제일 먼저 선진 서양문화를 배우려 유학을 갔고 조국과 겨례의 진정한 복지 수립을 위하여 몸소 구원의 복음사도가 되었다가 결국 그를 위하여 장렬한 희생이 되었다.
그 님은 15세 어린 나이로 무서운 쇄포망을 뚫고 만여리나 되는 유학의 길을 일곱달 동안 걸어 동양의 小西洋이란「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만 5년간 유학을 마치고 조국 근대화의 실마리라 할 수 있는 나라의 문호개방과 서양문화 수입계획을 하던 프랑스 해군제독 세실씨의 통역관으로 선정되어 한불수교조약 체결차 조선으로 향하려는「에리곤」군함에 몸을 실었다. 그리하여 마닐라로 대만으로 주산도로 환동으로 항해하여 따챵허(大莊河)에 상륙하였다. 거기서 마침 중국인 관헌들에게 곤욕을 당하던 서양 신부들을 몇마디 유창한 중국어 호령으로 구출하고 빠이갸덴(白家店)으로 갔다가 북경으로 가는 동지사 일행중에 혹시 끼어있을 동포 교우를 만나려고 변문=책문으로 갔다. 다행히 사절단 속에 섞여오던 김 프란치스꼬를 만나게되어 기해년(1839) 박해 사정을 자세히 들었다. 주교 신부는 물론 그 님의 부친 이하 교회 중추인물들이 일망타진되어 교회 형편이 말이 아님을 안타깝게 여겨 당장이라도 귀국의 모험을 시도하고 싶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3소년이 외국으로 빠져나간 것을 알게되어 그들이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무서운 올가미속으로 무모하게 뛰어들기는 매우 위험하였지만 그 님은 대담하게 압록강을 몰래 건너 고국땅에 들어섰다.그러나 주막에 들어 요기하려다가 본색이 탄로될번한 위험에 부닥치게 되어 서울행을 단념하고 도로 의주를 향하여 오다가 압록강 기슭에서 그만 눈더미속에 매몰되고 말았다.
그러나 백절불굴의 용사는 정신을 차려 변문을 거쳐 빠이갸덴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행여 북경에서 돌아오는 사절단을 만나 귀국의 기회를 찾으려고 두번이나 변문을 드나들었지만 허사가 되고말았다. 그 해 12월에 개주(蓋州)로 가서 고 주교 성성식에 참예하고 고 주교와 함께 봉천으로 동행하여 다행히 사절단의 교우 한사람을 만났으나 박해후 국경 경계가 너무 삼엄하여 외국인 입국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고 주교는 대건을 동반하여 몽고 빠갸즈(八家子)로 갔다.
거기서 대건은 입국 경로를 두만강쪽으로 변경해보려고 2천리나 되는 남동만주 어름벌판을 달려 함북 경원에 도착하여 조선교우를 만나기는 했으나 그 경로 역시 불가하므로 부득이 빠갸즈 고주교에게로 돌아오고 말았다. 여기서 뜻밖에 마카오에서 서로 갈렸던 동창생 최토마(朋九)를 만나 9개월동안 전에 못다 배운 신학공부를 마치고 그 해 12월에 부제품에 올랐다.
1845년 1월에 대건은 또다시 귀국의 모험을 시도하여 고국을 떠난지 9년만에야 서울에 도착하기에 성공하였다.
이렇게「에리곤」군함을 떠난지 2년4개월 동안에 수록으로 몇만리 샹하이를 떠나 요동ㆍ몽고ㆍ남동 만주 및 몇곳을 종횡하였던고! 고국에 돌아와보니 박해의 여풍은 아직 가시지도 않은채 오매불망의 어머님은 정처없이 떠도는 걸인이 되었고 주님의 목장은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큰일은 위하여 적은사정에 붙들리지 않으려고 어머님과 다른 교우에게 자기 입국 소식을 극비에 부치고 노독과 과로에 지친 몸이 2주간 몹시 앓다가 조금 회복되자마자 또 다시 과감하게도 경험이 없는 열한사람의 선원을 데리고 자그마한 목선으로 황해 풍랑과 덤벼드는 해적떼와 싸워가면서 간신히 중국상선의 구조로 무사히 상해 부두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국제법에 의하여 외국인 잠입이란 협의를 받게되어 벌떼와 같이 달려드는 중국인 관헌들의 무지한 압력과 파리떼와 같이 몰려드는 중국인 구경꾼들의 성화를 받게되었다. 그러나 용기 늠름하게 작대기 세례로 그들을 쫒고 영국 공사에게 교섭하여 중국 관헌의 무례한 간섭을 모면하기도 하였다.
부두에 상록한 김부제 일행은 조선으로 입국할 고 주교를 만나게 되어 열 한 사람의 선원들은 꽹가리 북장단에 특이한 춤으로 환영하였다.
김 부제는 상해 근처에 있던 金家港성당에서 고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 6일만에 수리된 난파선으로 고 주교와 안 신부를 대동하여 귀국항로에 올라 만난을 겪으면서 1845년 10월 12일에 무사히 강경 황산초에 도착하였다.
김 신부는 즉시 전교에 활약하던 9개월만에 중국에서 입국할 선교사들에게 연락하는 서신을 황해 앞바다에서 고기잡는 중국어선에 전하다가 발각되어 잡히게 되어 사학괴수로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40여 차 심문과 두차례의 어전회의를 거쳐 아깝게도 그 해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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