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세상 어느 나라에서든 밥상이란-그 모양새가 어떻든 간에-나눔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상 둘레에 앉는 것은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서 뿐이 아닙니다。 같은 문명과 같은 가정과 일과 여가의 공동체로서 하나가 된 이들끼리 함께 있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입니다。
땅에서 나는 온갖 소출은 상에 오르면서 그 맛과 내음이 갖가지인 것부터가 한상에 둘러앉은 식구들의 흥을 돋구어 서로 다른 다양한 느낌과 생각과 뜻하는 바에 있어 자신의 제일 좋은 면을 서로 나누도록 해줍니다。한 집안에서의 평화는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한 도시ㆍ한 나라ㆍ온세계에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할진대 「우리의 평화」(에페 2、14)이신 그리스도 둘레에 이 세상의 동과 서、남과 북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한데 모으는 성찬의 상에 이르러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나라치고 저마다의 동과 서、남과 북이 없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성찬과 평화、이 둘은 어떻게 서로 이어지는 것입니까? 이것과 저것 모두에 굶주리고、이것과 저것 모두로 그 굶주림을 채우는 삶、그 하나로 인해 다른 하나를 갈망하고、그 하나로써 다른 하나를 실현하는 삶을 뜻합니다。 그러나 우선 우리들 그리스도인 사이의 화해도 갈원하지 않는다면、어찌 겨레들 사이의 평화를 애타게 그린다하겠습니까? 한 굶주림이 없이 다른 굶주림도 없습니다。 그리고 성찬에 대한 「굶주림」없이 어찌 서로 화해할 수 있겠습니까?
화해에 대한 굶주림
격언에 이르기를 『저마다 제 집 앞을 쓸면 길이 온통 깨끗해진다』고 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들 자신부터가 우애의 증거를 안 한다면、사람들과 민족들 간에 평화를 이루기는 바랄 수조차 없습니다。 미래는 복음말씀대로(마태18、22) 용서하는 이들、일곱 번의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이들 편에 있습니다。 우리는 용서하거나 용서받을 용기가 생기는 순간까지는 막다른 골목 같은 상황을 누구나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정말 화평을 맺을 수 있는 것은 어떤 순간입니까? 그것은 둘이서 서로 『내가 너보다 더 나을게 없네』하고 말하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서로 마음이 풀리고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녹아버립니다。
성찬은 곧 시금석
성찬은 우리가 진정 평화를 이룩할 마음이 있는가 여부를 이룩할 마음이 있는가 여부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바로 성찬을 통해 우리에게 미움에서 사랑으로、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위대한 빠스카를 함께 하자고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당신이 성목요일 저녁에 하나로 묶어 놓으신 것、즉 발씻음과 성만찬을 도로 둘로 갈라놓지 말라고 일깨워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이 두 가지 구체적 행위를 불가분의 것으로、형제애의 성사인 같은 성찬의 양면으로 보셨던 것입니다。
언제나 창조적인 주님의 말씀은 성찬에 있어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서로서로의 종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자기 자신을 음식으로 주셨듯이 우리 또한 서로를 섬기고 위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성찬이야말로 모든 종족과 문화와 사상의 그리스도인들이 새 하늘과 새 땅과 더불어 영광 안에 돌아오실 그리스도를 (묵시21、1)기다릴 뿐 아니라、이미 평화가 임해있음을 선포하는 탁월한 자리입니다。 잔치동안은 분열을 잊듯이、성찬에 있어서도 하느님의 용서와 형제간의 화해의 잠정적 기쁨을 통해 이미 평화를 맛볼 수 있음을 그리스도인들은 온 세상에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주적 화해 향한 길
성찬으로써 우리들 자신을 기르는 수련은 우주적 화해의 길을 가는 우리에게 더욱 정신을 차리도록 해줍니다。
평화에서 이기는 것은 전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리고 평화를 지키는 것은 평화를 이겨서 얻은 것보다 더 어려우며、전쟁의 무기로 평화를 지키는 것보다 평화의 무기로 평화를 지키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평화는 모든 사람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지 정치나 경제전문가에게만 달려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날마다 남들과 더불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는 평화를 택하거나 아니면 이를 배척합니다。 오는날 시위행렬을 하거나 연판장에 서명을 곧잘 하면서도 자신의 생활은 이기심과 대화거부를 반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를 보고 어떤 입장을 취하라고 요구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생활에서는 그런 입장을 취할 엄두도 못내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습니다。 평화는 우리들 손에 달렸습니다。 그렇습니다。평화는 가능합니다。
-그대 자신이 첫걸음을 내딛어야 한다고 여긴다면、
-그대가 펴서 내미는 손의 「무력한 힘」을 믿는다면、
-그대가 나누는 밥이나 빵에 한 웅큼 사랑을 얹기를 잊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틀에 박힌 연쇄규격으로 이루어지는 오늘의 이 세상에서도 그대는 차이에 귀 기울일 줄 아는지、
-그대는 의혹을 품기보다 신뢰를 숨 쉬고 있는다면!
형제자매 여러분、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하는 여러분。 평화가、참평화가 어디서 오는지 우리는 알고 있으며、평화는、참 평화는 어디까지 가야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평화를 향해 나있는 길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 아들께서 몸소 가신 바로 그 길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서는 갈수 없는 길입니다。
성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증거함에 있어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와 함께 한다면 모든 평화가 가능함을 증거합시다。 그렇습니다。평화를 정말 믿기만 하면 됩니다。 평화를 십자가처럼 받아 짊어지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스도의 두 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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