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세유표에서는 주로 지관(호조)… 국가재정의 기틀이 되는 토지제도와 조세제도사(租稅制度史)와 조세제도사(租稅制度史)의 형성을 보겠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적 역구는 곧 실용의 안(案)으로서 제시된다. 특히 그의 전론의 역사적인 추구이었다.
사민(四民·사농공상) 론에 근거하되 인구 동태와 합쳐서 토지경영론과 일하는데 따라 양곡(糧穀)을 배분하자는 그 당시로는 가장 새로운 안을 제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산은 그 원형을 주례에게 이끌어옴을 명시하고 있다.
말종(末宗)의 유표에서 목민심서(48권ㆍ1816년)의 제작으로 붓을 옮긴 것은 다산이 일찍부터 농민들의 곤궁을 보고 바로잡아야겠다는 울분은 암행어사때부터 그가 충청도 금정에 나갔을때로 공주의 사창곡 협잡을 통분히 여기기도 했을 뿐아니라 강진에서 그 일대의 농어민의 고난을 전해듣는다던지 자기가 직접 목격한 바도 이 어려운 지경의 농민들을 하루바삐 건져야겠다는 심서_리에 착수한 것이다.
심서(心書)는 그대로 백성을 다스리는 목관-수령(군수… 등 지방관)의 농민들을 다스리는-먹고살게하는데의 안내서다. 여기서는 서울 조정에서 수령의 직을 맡아나가는데서부터 부임해서 백성에 대한 전권행사에 있어 일체 애인(愛人) 정신에서 한 것을 세밀히 하나하나 역사적실례를 들어가면서 지시한다. 첫째 수령이 목관으로 지켜야 할 일과 직접 행정에 있어 농민을 위하여 그들이 먹고 살게할 것을 지표로 일체의 협잡(관의 상하는 물론 토_…등)을 배제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며 또 관의 협잡의 배후에 있는 중앙의 왕실관계자 고관들의 시정과 현지에서 관의 협잡에 함께 협잡하는 민의 협잡의 배제도 지적한다. 공과 사를 대등되게 보면서 공-사의 구분을 엄격히 주장한다. 협잡의 배제에 있어 제일 요건은 절약임을 함께 강조하였다.
수령의 재정관리에 있어서도 역시 호전-전정과 조세를 제일 중시하며 한편 당시 재정적인 협잡의 핵심이 되었던 환곡과 군포문제에 치중해서 각양의 협잡의 사례를 지시하고 있다.
심서의 체제도 중심은 육전(六典)에 두고 전후에 수령이 지킬 몇가지 조건을 첨가하고 있다.
그러나 다산은 심서제작에 있어 그때까지의 자신의 학(學)과 경력과 또 이미 제작된 시문중에 직접 긴하고 관계있는 것은 서슴지 않고 자기의 새로운 개혁적인 생각에 첨가해서 논리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시문은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그 변화의 무상을 읊는데 멈춘 것이 아니라 직접 자기가 살고있는 현실사회를 바로 인식하는데로 펼쳐졌었다. 그러므로 그의 시문에는 현실 정치의 잘못됨(모순-협잡-부패-비인간적, 폭력적인…)을 본대로 느낀대로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어 그러한 현실적 문학정신은 그대로 목민심서의 기본정신에 크게 작용하고 조화되고 있다.
우리들의 다산의 목민심서를 읽을때 꼭 심서만 읽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한 평생을 두고 추구한 「인간사랑의 마음」을 추구하면서 읽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가 읊었던 시는 물론 그의 경서연구(다산은 경학자는 아니었음)와 심서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유표(遺表)와 그의 의약 음약의 연구도 인간을 구원하는 뜻 인간의 심성을 예(禮)로 바로잡기 위한 일이었음 에서 이러한 정신에서 저작되는 「흠흠심서」는 다산자신의 말대로 유표와 심서와 아울러 그의 삼부작의 하나이다. 내용이 어려운 법의학의 책자이며 경학사상에 근거하는 일반으로는 까다로운 책이지만 다산정신이 「인간」중심이었음을 여기서도 볼수 있다.
다산옥에서 심서의 제작을 마치자 18년의 유배에서 풀려 마현로 돌아오게 되었다. 어수선하게 흩어진 고향집에 돌아온 다산은 계속 공부하였다. 그가 만년에 주로 연구한 것은 주례의 일부와 상서(상서고훈ㆍ지원록ㆍ매씨서 등)연구에 집중한다. 이로써 보아도 그는 남은 생애를 역시 자기의 정치·경제개혁안을 보충할 사상 및 근거를 찾는 작업에 힘쓰고 있었음을 알겠다. 상서연구에서 엿볼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애를 쓰고, 당시의 이 나라와 이 나라의 농민-백성들을 위하여 남겨 놓은 저작에 대해서 다산은 애착을 갖지 않았다. 이사회에서 소용없다면 태워버려도 아깝지 않다는 뜻을 말하기도 했다.(「목민심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땅은 사람이 사는데 이용할 것이니, 죽어서 사람들이 경작해 먹을 땅을 차지해서는 안된다고 하며 무덤은 쓸 소용이 없는 땅을 골라서 써야 한다고 하면 자기의 묘지도 그러한 곳을 택해서 지시하고 갔다. 한마디로 민족적으로 훌륭한 선생님이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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