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9ㆍ30일 양일간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에서는 수녀원 창립 25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김안나 수녀작「아릿나릿골의 혈제」(4막8장)를 박요셉 수녀 연출로 서강대학 극장에서 공연한바 있다.
순교극을 대대적으로 공연한 것은 1968년 극단「드라마센타」의「이름없는 꽃들」과 작년「극단 69」의「김대건 신부」에 이어서 세번째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전년도의 두번 공연은 기성극단들의 공연이었고 이번 것은 순수 아마튜어, 그것도 수녀들만에 의해서 무대에 올려졌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많은 경비와 노력을 들였음에 비하여 성공을 거둔 작품은 세편 중 한편도 없었다. 그 이유는 세 편 모두가 공동적으로 희곡 작품이 좋지않은데 원인이 있었다. 이번 복자수녀회의「아릿나릿골의 혈제」공연만 하더라도 그 작품이 비극임에도 불구하고 막이 다 내린 뒤에 관객들의 표정은 비극에서 맛보는 심통한 것이 아니었고 이상한 미소를 띤 아쉬운 표정들을 읽을 수 있었다. 관객들의 그런 표정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연극이 관객들의 열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데 있다. 즉 연극이 관객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관객들은 아무런「카타르시스」를 일으키지 않은 것이다. 그러면 그 연극이 실패한 원인은 무엇인가. 첫째 희곡작품에 결함이 있다. 연극이 인생 그 자체가 아니듯이 역사극도 역사 그 자체여서는 안된다. 작가가 사학도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상당히 고증에 세심한 신경을 썼지만 작가가 그 역사, 그 인물을 어떻게 보았으며 그 역사와 인물을 통해서 인생의, 종교의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였느냐 하는 작가의 사상이 부각되지 않았다. 만약 역사 그 자체를 많은 사람들에게 주지시키려고 한다면 팜프렛이나 역사책을 읽히면 될 것이지 구태여 많은 경비와 노력을 들여 연극을 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즉 작가가 예술적인 눈과 감각을 지니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황극영이 장원급제(16세)하여 순교(27세)할 때까지 11년간을 한 무대에서 제한된 2시간 동안에 재원시켜야 했으니 연극이 어떤 인과관계 속에서 물 흐르듯이 풀려나가지를 못하고 토막토막 끊기고 지리하며 그의 일대기중에서 중요부분만 구경시키는 환등이 되고 만 것이다. 따라서 극적 긴장감이 없다. 그러니까「아릿나릿골의 혈제」도 작년「극단 69」의「김대건 신부」(이원경 作) 공연과 똑같은 실패를 한것이다.
작가가 역사적 사실을 작품화 할 때 너무 사실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근본적 사상만 외곡시키지 않고 마음대로 창작의 세계를 펼칠수 있어야 한다.「아릿나릿골의 혈제」에서 주인공 황사영은 완전한 성인으로 미화되었다. 마치 고대소설의 주인공들과 꼭같다. 그러니까『황사영은 천주님을 위하여 생에 아무 미련없이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고 하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을 구태여 장망하게 무대위에서 떠들어댈 필요가 무엇이냐 함이다. 신과 인간, 사랑과 증오, 삶과 죽음, 선과 악, 종교와 반종교 등이 맞부딪치는 상극과 갈등 밑에 깔려있지 않기 때문에「아릿나릿골의 혈제」는 예술작품이 되지 못한 것이다. 즉 희곡 구성상의 기본이 결여되어 있다고 하겠다. 차라리 사실에 충실하려 했다면 황사영이 순교하고 그의 _자권속이 사방벽지로 유배되는 일가이산의 비극적 정황을 리얼하게 묘사했어야 했다. 황사영의 처를 공주의 시녀로 만든 것은 작품을 너무 안역하게 처리한 것이다. 그리고 황사영과 아내ㆍ공주ㆍ포도대장의 삼각애정 갈등도 황사영을 지나치게 성화시켜 맥빠지고 석연찮은 관계로 끝나고 말았다. 아무리 역사속의 인물이라 해도 작가는 현대적인 안목을 갖고 현대상황에다 옮겨놓고 승화시켜야 한다. 둘째 실패원인은 연출 부재에 있다. 좀 유능한 연출자라면 희곡작품의 결합을 어느정도 극복할 수 있다.
그런데 연출자(박요셉 수녀)는 그나마의 작품도 버려놓고 말았다.
작품 스타일 전체가 1920~30년대의 신파극 그대로의 답습이다. 즉 배우들을 쓸데없이 많이 울린 것은 신파조의 감상성과 홍루성을 모방한 것이고 오바액션도 마찬가지다. 왜 징은 그렇게 꽹꽹쳐서 관객들을 놀라게 하는가. 크라이막스를 가르쳐주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관객들이 감동을 하지 않으니까 감동을 하라는 신호인지 알 수가 없다. 연출자는 냉정해야 한다. 관객보다 먼저 흥분해 있어선 안된다.
왜냐하면 객석에서는 항상 반대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희곡은 작가의 책임이지만 무대에 올려진 연극은 연출자의 책임이다.
셋째로는 연기자들의 미숙성이다. 특히 지적하고 싶은 것은 여성들이 남자 역을 하면서 억지로 남자 음성을 내는데서 오는 이상한 억양과 톤이다.
그래서 더욱 부자연스러운 무대가 되고 말았다. 우_동작도 신파극에서나 하는 마임이다. 효과와 조명도 그 연극을 망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보겠다. 연기에 있어 순조ㆍ대왕ㆍ대비ㆍ공주와 시녀 역은 매우 침착하고 호연을 보여준 배역들이다. 작자서부터 연출ㆍ연기ㆍ장치에 이르기까지 연극을 수업하지 않은 수녀들간의 무화였다는 것은 우리나라 가톨릭 사상 처음있는 일로서 평가하지만 아마튜어들의 애교로만 보아주기엔 너무 많은 경비와 노력과 공이 들지 않았을까? 앞으로의 분발을 기대한다.
문화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