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들은 우상에 기울어진 이스라엘의 종교적 타락을 질타하면서 야훼의 성성을, 가난하고 미소한 자들을 착취하는 사회적 불의를 고발하면서 심판관으로서의 야훼를 증언하였다. 그들은 야훼의 뜻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던 이스라엘의 불충실을 폭로하면서 야훼를 신실한 「남편」으로 묘사한다. 우상숭배에 몰두하면서 방탕을 일삼던 이스라엘은 간통한 아내와 같다(예레3.6~11). 야훼는 이스라엘에게 마치 자식들을 보살피는 아버지이지만 그들은 아버지에게 대드는 불효자와 같다:『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자식이라 기르고 키웠더니 도리어 나에게 반항하는구나」』(이사1.2). 예언자들이 이스라엘의 종교적·도덕적 타락과 사회적 불의를 신랄히 비판하는 이른바 심판의 설교 안에는 거룩하고 초월적인 야훼가 고발자와 심판관으로 부각되지만 그 메시지 이면에는 항상 『사랑과 진실이 넘치는 야훼』(출애34.6)의 자비가 여전히 증언되고 있다. 예언자들의 사상을 떠받히고 있는 바탕이 선택과 계약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록 타락하였고 불충실한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야훼의 성성을 강조하지만 사랑과 자유 안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그들과 계약을 맺으신 야훼의 신실과 자비를 증거 한다. 이런 문맥 하에서 예언자들이 제시한 하느님의 여러 표상을, 목자·임금·남편·아버지 따위가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에게 말씀을 건네고 당신마음을 열어 보이며 그와 친숙한 관계를 맺으시는 야훼의 위격적 면모가 인간관계의 그 같은 표상들에 의해 다시 한 번 부각되고 집약된다. 야훼가 양들을 돌보는 목자처럼,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처럼, 자식을 키우는 아버지처럼 인간에게 너무나 가까이 와 계시는 하느님으로 계시될수록 그분의 내면적 본질이 더 잘 드러난다. 이 같은 계시의 과정에서 의인화된 지혜와 영은 하느님의 아주 가까운 현존을 계시하면서 그분의 위격성을 시사해준다.
아버지
모든 고대 민족이 그들의 신을 아버지라 불렀던 것처럼 이스라엘도 야훼를 아버지로 모셨다(신명32.6:예레31.9:31.20:호세11.1:출애4.22). 그러나 이교도적인 신화에 빠져 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그렇게 부르기를 꺼려하였다. 야훼의 부성(父性)을 특징짓는 것은 창조와 계약개념이다.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지 그분으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혈육의 유대관계가 전혀 없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그분이 이 백성을 당신 것으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내가 친히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시편2.7). 왕은 출산에 의한 하느님의 친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호의로 양자가 된다. 입양(入養)에 의한 부자관계이다.
하느님이 이스라엘에 쏟는 참 애정을 부각시키는 관계이다. 야훼가 아버지라 불리우는 이유는 그분이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에게 주권을 행사하며 또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우주를 창조하신 야훼가 만사를 애정으로 돌보시기 때문에 아버지이시다. 이 비유적 표상은 만물을 초월하는 창조주의 세심한 배려와 애정을 나타낸다. 야훼는 『고아들의 아버지』(시편68.5)이시다.
「하느님 아버지」는 초월성과 권위를 나타내는 반면에 세상과 인간을 향한 애정과 관심을 표현한다. 야훼는 은혜를 베푸는 주권자이시며 순명과 신뢰를 요구하는 섭리자이시다. 인간은 주인을 섬기는 종처럼 야훼의 주권에 승복하고 그분에게 무조건 순종하여야 한다. 야훼의 아들인 이스라엘은 모두 그분의 종이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종들이다.
지혜
지혜가 말씀과 직결되어 의인화 되면서 그 역할이 보다 두드러진 것으로 묘사된다. 하느님의 지혜는 영원으로부터 영원에까지 존재하는 신적 실재이다(잠언8.22~26:집회24.9). 그것은 지존하신 분의 입에서 그분의 입김 또는 말씀처럼 나온다.
그것은 『신적 권능의 입김이고 전능하신 분의 찬란한 영광이며 영원한 빛의 반영』(지혜7.25~26)이다.
또한 하늘에 거처하고 하느님의 어좌에 앉아 있으며 하느님과 긴밀히 화합하여 지낸다(지혜8.3).
하느님의 첫 노작으로 지음 받은 지혜는 만물이 창조될 때에 주인공으로 이미 있었고 사람들과 사귀기도 전에 우주 속에 뛰놀고 있었다(잠언8.22~25). 만물에 앞서 창조되었고(집회1.9)창조 때에 하느님 곁에 뛰놀던 지혜는 우주를 끊임없이 다스리며 하느님이 세상 안에서 역사하시는 모든 일에 관련되어 있다.
영(靈)
영을 가리키는 헤브레아어(루아흐)는 바람이나 입김 또 숨을 뜻한다. 바람이 자연 안에 새로운 어떤 것을 일으키는 힘이라면 영은 숨은 생명체를 유지하고 살아 움직이게 하는 힘이다. 영은 거역할 수 없는 강한 힘이고 모든 것을 살리는 생명력이다. 하느님은 영으로써 모든 것을 살리고 변화시키며 새롭게 하신다(시편104.30). 영은 온전히 하느님에게 속해 있다. 자연 안에 있는 영과 온갖 생명체 안에 있는 영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입김이다.
영은 창조하는 하느님의 생명력일 뿐 아니라 사람들을 사로잡아 신적 사명을 수행하게 하고 역사 안에서 구원의 효력을 발생시킨다. 영을 받아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에 의해 영은 말씀(또는 지혜)과 결부된다.
하느님은 말씀과 영 안에서 우주를 창조하였다: 『야훼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어졌으며 만물이 그 입김으로 이루어졌도다』(시편33.6:참조, 창세1.2). 영은 말씀처럼 창조하는 능력이고 구원을 실현하는 힘이다. 영이 사람들을 사로잡아 파견하고 그들로 하여금 마음속에서 부터 하느님의 말씀을 맛들이게 해준다.
말씀과 영은 마치 인간의 두 손처럼 야훼가 창조할 때 역사 안에서 활동하고 당신을 계시할 때, 백성을 인도하고 심판할 때 함께 일한「존재」들이다. 그것들은 초월전인 야훼가 백성 한가운데에 효과적으로 현존하거나 백성 편에 개입하기 위하여 이용하는「중재 존재」처럼 묘사되었다. 창조와 구원의 능력을 가진 중재 존재로서 야훼의 초월성과 가까운 현존을 나타낸다. 『하느님의 말씀 및 영의 의인화는 야훼의 풍요로운 생명을 증거하며 동시에 신약의 삼위일체의 계시에 대한 모색적인 예감내지는 파악일 것이다. 하느님의 존재가 충만하기 때문에 그 위격은 여럿이시다』(A, 다이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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