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敎會思想史에 新起点을 마련한 제2차 「바티깐」공의회는 아직도 전근대적교회체제속에 정체되어있던 한국교회 정신풍토에 신氣風을 휘몰아왔다. 이런 싯점에서 한국교회가 겪을 과도기적진통은 불가피한거지만 이제 뒤늦게나마 加速度로 변천하는 現代思潮에 호응하여 현실참여를 위한 방안모색에 안간힘을 쓰고있다.
과연 70년대의 교회는 어떤양상으로 쇄신 변천해갈 것인가?
70년대를 전망하는 이 좌담회서 각계의 교회 저명인사들은 앞으로의 교회를 위해 유례없는 열의와 성의로써 자체의 과감한 비판내지 건설적인 제의를 했다.
이에 이 좌담회의 독후감을 널리 모집하여 보니에 게재함으로써 70년대 한국교회를 위한 보다 넓은 대화의 광장을 마련코자 한다.
뜻있는 분들의 많은 호응을 기대한다.
□ 좌담하신분<발언순>
오기원(서울 대방동교회 주임신부)
현석호(평신도사도직 서울협의회장)
김몽은(서울 수유리교회 주임신부)
나상조(전국가톨릭학생련 지도신부)
박갑성(서강대학 철학과 교수)
류홍렬(평신도사도직 전국협회장)
구상(사회·본사 논설위원)<경칭 略>
◆ 전교
백만신자 돌파
구=제가 이 좌담회 사회를 담당하는 것은 마치 장님이 눈뜬 사람 이끌기격이라 하겠읍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 말씀의 접속사(接續詞) 구실이나 할까 합니다. 맨처음 화제로서는 가톨릭시보사가 1970년대의 「캐치루레이즈」라할까, 구체적 기치로 내건「한국 백만신자 돌파」운동에 대한 여러분의 소견과 그 새로운 전교방법 등에 대하여 한국전교신부님으로서 원로의 한분이시며 또 막말로 「챔피온」이신 오 신부님부터 말문을 열어 주십시요.
오=나부터 먼저 매를 맞으라는겝니까? (일동웃음) 백만신자돌파운동은 이미 우리 본당신부들 사이에서 입담아 오고 있었읍니다만 결국 그 방법 문젠데요. 나는 벌써부터 이런 주장과 실천을 해오고 있읍니다. 즉 교우 한사람이 1년에 미신자 한사람을 영세시키는 운동인데 교우들이 열과 성의만 가진다면 자기들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나 이웃이나 직장의 동료를 1년에 한사람씩 교회에 이끌어 들이는 것은 문제없다고 생각합니다.
구=신부님의 말씀대로 매년 배가운동이 달성된다면 70년말에는 백만이 아니라 천만도 되겠읍지요(웃음) 그런데 실제 신부님의 그 운동의 성과는 어떻습니까?
오=물론 나도 작년부터 이 운동을 전개하였고 그 성과보다 신자들에게 이 운동의 정신을 불어넣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나 작년에 우리 대방동 신자들중 이 운동에 참여한 약8할이 성과를 낸 폭이어서 4백여명의 개인전교에 의한 영세자가 나왔으며 전가족을 여럿 이끌어 온 분도 있읍니다. 이런 교우는 이번 성탄에 표창을 할 작정입니다.
과거교회는 선진적, 현잰 후진
현=나는 좀 더 의욕적인 기치를 내걸고 싶습니다. 즉 1984년이면 가톨릭이 한국에 들어온지 2백년이 되는데 그 2백년에 2백만 신자 돌파를 달성하자는 것입니다. 예전에 성청 인류복음화성성 차관이 오셨을 때 이런 목표를 말씀 드리고 그 2백년 축제에는 교황 성하께서 한국에 오셔서 세계성체대회를 지내게 해줍시사고 청원한 일도 있읍니다. 우리가 오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각 본당별 배가운동은 물론 좀더 적극적인 전교방법을 모색하고 이를 추진한다면 2백주년에 2백만은 꿈이 아닐줄 압니다.
구=글쎄요? 역시 목표보다는 방법론이 문제가 되겠는데요.
금=그렇습니다. 이번에 선교에 관한 교령도 나왔읍니다만 현대에 있어 특히 한국에 있어 우리가 어떻게 이 시대에 부응(副應)한 전교 방법을 수립하느냐가 문제입니다. 특히 이 시대의 가장 어려운 것은 청소년들의 동향입니다. 실제 우리본당에만 보더라도 지금의 청소년들은 교회에 모이질 않거던요. 이것은 한국교회가 과거에는 전진하는 문화지는 현상 같은 것이 관련을 갖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좀더 크고 넓은 안목을 가지고 새로운 전교방법이 모색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대학생 과반수가 냉담
나=나는 깡패대장이라 좀더 솔직히 말씀드리겠는데…(일동 폭소) 급변해가는 이 사회사조를 개인이 못미치는데 제도화된 교회가 어떻게 따라갈 것이냐교 호소하고 있듯이 새로운 전교방법이 여기서 수월하게 제시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역시 주교님들의 회의에서 논의되어가지고 다방면의 인재동원과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여 교회내에 연구 기관을 두어 우리한국의 현대상황에 알맞는 전교방안이 수립되여야 하겠죠. 그런데 나는 오늘날 이시점에서 생각되는것은 이런 수의 중대문제가 아니라 이미 확보된 신자들의 이탈문제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대학생들이 큰 문제죠. 내가 보기로는 우리 가톨릭대학생의 약 반수가 냉담이라고 해도 과언이아니죠. 또 이들 지식인들이 사회에 나가면 더욱 많은 숫자가 교회와 등을 돌리죠. 교회에 가장 중추가 되여야할 젊은이들, 더우기 지식인들이 이모양이니 우리 한국교회의 장래를 백만돌파, 2백만돌파 하고 내거는 것은 한국적인 통제학의 숫자 나열처럼 들리는군요(일동 폭소) 그런 수보다 오히려 질을 높혀야죠. 그러니 교회는 윤리적단체나 정의의 단체처럼 선교를 생각할게 아니라 구원의 단체로서의 면목을 발휘해야 할 것이요, 또 전교 다양성을 발휘해서 「엘리트」들을 확보해야 할 것입니다.
구=그 말씀에서 연상되어 생각되는게 있는데 오늘날 「로마」의 개혁의 물결이 우리 전교사업에 있어서 혼란이나 장내를 가지고 옵니까. 오히려 활력(活力)을 띄게합니까.
나=「바티깐」공의회 목적이 바로 현대의 복음전파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는게 아니겠읍니까. 요한 23세께서 말씀하셨듯이 현대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발견해서 전교야지 과거 교회의 말은 오늘의 교회밖사람들에겐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시지 않았읍니까.
예비자 교리간소화ㆍ전교 현대화
현=나는 역시 양과 질을 병행하는 방법을 써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기 위해서는 과거 성당중심의 예비자교리 전수방법은 탈피되고 지양되어야 할줄압니다. 생활이 바쁜 현대인들에게 준비기간이 6개월이나 8개월은 무리입니다. 믿겠다는 마음을 표시했을때 일단 받아들이고 차차 교육해나가는 방법을 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예비자교리를 간소화하는 동시에 일반신자들의 끊임없는 재교육이 시행되어야 양도 늘이고 질도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교방법에 있어서도 이제까지 찾아오는 사람을 가르치는 소극적 자세에서 기동성을 발휘하여 직장 아파트 또는 거리에까지 진출해야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오=내가 들은 웃으운 얘기 하나 하지요. 멕시코 신부에게 그대들은 어떻게해서 기독교나라가 되었느냐고 했더니 스페인식민지 당시 총을 대고 신앙을 강요해서 이루워졌다는것입니다. (웃음) 우리는 이런수야 쓸 수 없지만 재래의 문답주입식만 가지고 70년대 전교에 임해서는 실패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역시 신자 하나하나가 「맨·투·맨」으로 나아가는 것을 최상책으로 압니다.
금=그러기 위해서는 선교교령에도 명시된 바 평신도들이 그리스도의 증거자·예언자적 사명 즉 평신도사도직을 어떻게 수행하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평신도들의 철저한 재교육이 필요하며 그들 한사람 한사람이 다 교리교사가 되고 또 생활로서 복음을 침투시켜야만 우리의 목표를 달성할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이런 것 없이 70년대 우리한국을 풍미할 것으로 예상되는 극단적 물질주의 사회풍조 속에서 전교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수 증가보다 기존 신자 확보
박=나는 나 신부님 견해대로 백만이다 2백만이다 신자숫자의 나열은 서투른 얘기라고 봅니다. 또 전교가 어려워진 것은 70년대부터가 아니고 이미 60년대, 50년대부터 역현상(逆現象)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즉 백만 끌어모아서 50만이 나가면 무엇합니까. 교회가 앞으로는 들어오게 해놓고 뒷문으로 내보내는 현상, 나가는게 아닙니다, 내쫓는, 전교의 반대 현상이 지금 빚어지고 있지 않읍니까.
구=그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하면?
박=여러가지 있읍니다만 특히 예를 들면 교회내 「스캔달」같은 거지요. 오늘의 신자들을 귀막고 눈막고 천주만 믿으라곤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가령 오늘날 열심한 신자가 신성한 곳을 찾는 사회인사에게 안내할 수 있는 서울시내 본당이 몇이나 있겠읍니까. 나는 거의 없다고 봅니다. 그들을 인도했다간 가톨릭에 실망을 시키는 결과만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를 늘릴생각을 할게 아니라 위선있는 신지들을 확보하기 의해 군대에다 비교해 말하면 이렇듯 자체의 상하대열이 흩어지고 문란(紊亂)해가지고 어떻게 새로운 전투를 한다는 겝니까.
류=나는 사학가라 역사적으로 우리의 선교상황을 흝어볼 때 해방전까지는 불과 약12만의 신자수가 해방후 24년동안에 80만이나 되었으니 악5배 나는 셈입니다. 물론 이런 내폭적인 증가에는 6·25라는 인간의 비참한 체험이 신앙을 찾게했고 또 한번 밀가루신자라고 말하는 교회의 원호사업이 주효하기도 했고 또 정치적 전교라 불리우는 장면 박사의 영향력도 켰다고 봅니다. 그러나 70년대 우리 사회 여건은 전교면에 있어선 오히려 지난시대보다 곤난한 시대로 보아야합니다. 첫째 박 교수 말씀대로 해마다 늘어가는 냉담자의 방지를 하지않고선 모든 전교활동이 헛수고가 됩니다. 이런 양면을 추진하기위해선 나는 각 「액션」단체와 「서클」활동의 활기있는 운영에 기대를 겁니다.
박=냉담자 방지라고 하지만 나는 차라리 성당에 안나오며 자기신앙의 상실을 행동으로 표시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양심적이고 떳떳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포함해서 애기입니다만 오늘날 성당에 나오며 신앙을 보전하고 있다는 사람들이 진정 신앙의 불꽃을 활활태우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리 70년만 한국교회와 신자가 모두 병들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일동 웃음)증세는 이렇게 광범하고 심각합니다.
그리스도 현대에 오면 「히피」두령?
오=박 교수님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그야 세계교회가 병들었지만요…
나=이번「뉴델리」에서 열린 학생지도신부회의에 가보니 거기서들 하는 말,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현대에 오셨다면「히피」족의 수령(首領)이 되셨을꺼래요. (일동폭소) 이것은 「히피」족들이 물질화되고 향락화하고 개인화한 문명에 대하여 인간의 본연과 그 생활을 되찾으려는 도전이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앞장서실 꺼라는 얘기죠. 또한 세계각국신부들이 입을 모아얘기하는 것이 오늘의 교회가 가친성(可親性)을 상실했다는 점이었죠. 한국교회도 우리 상황속에서 이 가친성만 회복한다면 가만히 않아있어도 농사(農事)는 되며 본당신부님들은 영세 주시기 바쁘시죠.
박=그리스도께서 「히피」족이 되셨을 것이라는 것은 몰라도 「아씨시」의 프란치스꼬 성인께서는 아마…(일동 웃음)
나=아니, 아니 「히피」족들이 이미 프란치스꼬 성인을 자기들 본거지에다가 주보(主保)처럼 모시고 있다고요.
구=이렇게 너무나 문제의식을 확대시키고 심화(深化)시키면 한량이 없으니까 좀 더 화제를 현실에 밀착시켜 주시죠.
금=그러니까 결국은 우리 80만신 자들이 하느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자각을 항상 되살려서 이것을 생활로서 실천하는것이 곧 자체정화의 길이요 전교의 근본이기도 하지요.
오=얘기가 대체로 두가지로 대별되는군요. 하나는 전교로서 양적인 수도 늘리고 신자 재교육으로서 질적인 운동도 신자 재교육으로서 질적인 운동도 하자는것이요.
또 한쪽은 무엇보다 교회자체내의 정화운동과 재건운동이 시급하고 이것이 없이는 전교도 소용없을뿐 아니라 되지도 않는다는 말씀들인데 요는 이게 모두 병진(倂進)되어야할게 아니겠읍니까. 그래서 세포적으로는 다양성있게 나가면 되겠지요.
구=그러면 아까부터 교회자체내의 정화문제가 문제되고있는데 교회가 구체적으로 반성해야할 점은 어떤 것일까요.
젊은 지식층들은 교회에서 고민해결 못하고 실망 이탈
나=내가 학생들과의 솔직한 대화에서 체험하고 있는 일입니다만 학생들은 우리 기성세대가 모를 여러가지 복합적 문제와 고민을 안고 있거든요. 그들은 그리스도가 구세주이고 하느님이고 아랑곳 없이 교회속에서 그들의 고민을 해결해보려고 들지만 실망하고 이탈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교회가 품안에 있은 사람들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밖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 드느냐 이말입니다.
구=신부님! 신부님이 말씀하시는 그런 문제를 교회적 입장에서 해답과 방안을 제시해주시면?
나=교회의 근본태도가 틀려있으므로 이것을 시정해야 하지만 여기서는 말하기싫구요…(일동웃음)
◆ 교회운영
민주화된 기구에 신자참여
구=신부님 말씀의 「뉴앙스」로서 이 문제는 이쯤서 넘기기로 하고 오늘의 우리교회 사업에 있어 가장 논란(論難)되는 것이 교회운영의 전근대적인 요소인데 이러한 교회행정의 합리화를 어떻게 하면 이룰 수 있겠느냐에 대하여 전교회기구와 교구, 본당, 단체를 막론하고 언급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류=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 한국교회는「빠리」외방전교회의 봉건적이라고 할 보수적인 교회운영 속에 놓여있읍니다. 여기서 첫째 탈피햐야하고 먼저 찾아야할 것은 「바티깐」공의회에 따른 진정한 대화정신을 교회운영에서 살려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주교와 신부간, 신부와 신자간의 간격없는 대화와 협의가 이루어져야 되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서울교구의 현상으로는 주교님과 본당신부간에도 의사가 소통이 안되는데 신자와 어떻게 대화가 됩니까? 이것은 신자들에게 큰 악영향을 줍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성직자간의 대화가 원활히 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현=교회는 이제까지 신자를 통치한다는 관념을 가진 느낌을 주어온 것입니다. 이것은 양을 치는 목자 즉 사목정신에도 어긋난 것입니다. 그래서 제도나 기구도 그런 봉건적인 구태를 벗아나지 못하고 있읍니다. 이것을 위선민주화하고 현대화하고 능률화하여야 하고 그 기구속에 평신도들을 참여시켜야 할줄로 생각합니다. 가령위선 교구에는 각 부문별 전문위원회를 두고 각직능별 신자들을 활용해야 됩니다. 사목위원회 같은데도 신자들을 참여시켜야하고요. 또 이렇게 교회운영이 합리화되어야 사회와 연결을 가질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교회와사회는 언제나 동떨어진 것이 될 것입니다.
신자자치에도 난관
오=그러니까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죠. 구슬이 한말이 있어도 이것을 꿰느냐? 못꿰느냐? 하는 문제죠. 결국 실이 있어야하고 기실이 꿰는 구실을 잘해야 할텐데 점병이라 이 말씀 아닙니까 (일동폭소)
구=그런데 아주 헌신적인 교회운영과 신자의 그 참여속에도 문제는 있는 것같습니다. 저의 시골 왜관본당은 백 신부(독일인)님이 아주 진보적인분이어서 벌써 3년째 신자의 전적인 자치제를 실행하고 있읍니다. 신부님은 생활비로 3만여원인가만 받으시고 일체교회의 행정에선 손떼시고 성무만 집행하시는 거죠. 그 결과 교회수입은 겨우 인건비를 충당하는데로 어려울 지경이요. 그의 교회사업은 추진이 잘안되고하여 일부에는 도루 신부님에게 말기자는 얘기까지 돌고있지요. 물론 그러나 신자들도 모범신자들이라 그대로 해나가고는 있읍니다만은… 이런 예로 볼 때 교회운영의 신도자치가 현우이익실정, 즉 경제실정에서 가능한가부터 검토되었으면 합니다.
오=그렇게 맡겨도 보고 또 다시 맡아도 보고 절충도 하면서 단계적으로 해나가는 거죠. 오늘의 서울시내 본당 형편을 볼때 아까도 말한바대로 구슬만 잘꿰면 경제적으론 자치가가 능하다고 봅니다.
박=나는 좀 더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석해나가고 싶읍니다. 사목즉 목자라고하면 이것은 정신적인 지도자입니까? 또는 현실적인 지도자입니까?
나=목자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지요. 첫째는 예언자적인 요소…
박=그것도 정신적인것.
나=둘째 복음전파…
박=그것도 정신적인것.
나=셋째 그리스도의 대리자…
사업과 성무전도시키는 자기인식 착오도
박=그것도 정신적인 것, 그렇다면 목자란 철두철미 정신적인 지도자요, 또 그 정신적이라는 것도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적(救援的)인 것이 목자 본래의 모습일진대 그렇다면 이런 신부들이 오늘의 정부의 구호대로 경제제일주의를 하려들거든요. 거기다 이런 사업하는 것이 성무보다 더 어려운 것 더 가치있는 것으로 아는 모양이거든요. 이런 자기인식착오가 무엇보다도 문제입니다.
금=박 선생님께서 사목이란면 마치 성직자에 국한시켜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려서 한마디 부언하겠는데요. 「에페소」서에 나오는 사목의 정의를 보면 하느님으로부터 우리는 누구나 소명을 받고있기 때문에 자기 재능대로 자기입장대로 우리는 누구나 책임을 져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교님을 비롯한 긴부, 수사, 수녀와 일반신자가 다 똑같이 제나름대로의 책임이 있읍니다.
나=나는 아주 잘라서 말하겠읍니다. 아까 구 선생님이 말씀한 왜관의 신도 단독 자치제는 아주 잘하는거구요. 박 선생님이 말씀하듯 앞으로 신부는 성사주고 교리가르치고 병자 찾아다니는 성무만 해야하고 교회 모든 행정과 사업은 일체 신자에게 넘겨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직접경험하고 있지만 신부가 다방을 하고 집세를 놓고 거기에 머리를 쓰면서 성무가 어디 옳게 집행됩니까.
박=그렇습니다. 그리고 아까 왜관본당의 일부신자들이 두루 행정을 신부에게 넘기자고 했다는데 이런 경향은 안될 말입니다. 원칙이 옳고 또 그 방향으로 나가기로 했으면 다소 곤란이나 좌절이 있더라도 끝까지 밀고 나가야지 좀 해보다 잘 안되니 『넘긴다』든가『넘기라』든가 하는것은 안될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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