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껏 잠 못잔 사람의 냄새를 풍기며 늙은 끄레망이 들어왔을 때 어린 피에르는 한창 꿈을 꾸고 있었다. 그의 형 앙드레는 사형수가 놀라듯 벌떡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았다. 심장이 둥당거리는 소리가 귀속까지 울리는듯 하다.
『어떻게 됐어요?』
그러나 피에르는 여전히 꿈나라를 헤메고 있다. 눈을 보고 있는 것이다. 아니 차라리 그것을 상상해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광부촌의 눈은 항상 회색이었는데 꿈속의 눈은 샛하야니까…피에르는 잠속에서 미소짓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아직 몰라』끄레망의 대답이다.
손에 든 광부용 람프가 마치 극장무대에서처럼 그의 얼굴을 밑에서 비쳐주고 있었다. 깊숙히 파인 주름살마다 석탄가루가 잔둑박혀있다.
『얘들아 빨리일어나 어머니가 찾으신다』
끄레망은 땅속에서 울려나오는듯한 둔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그런데 아버지는?』
하고 앙드레는 다구쳐 묻는다.
『가자!』
피에르는 미소띠운 얼굴로 기지게를 킨다. 형은 아우를 깨우려고 그의 뺨을 쳤다. 몇시간전부터 앙드레는 눈을 뜬 채귀를 기울이며 시간을 헤아리고 있다. (아마 밤열두시는 됐을거야…)
그러나 벌써 새벽이 창문에 훤히 밝아 오고있다.
『피에르 서둘르지 않으면 넌…. 얘는 도무지 아무 것도 모르는 모양인가?』『그 나이에 뭘 알겠나』 어린애가 없는 끄레망은 이렇게 대꾸하며 허리를 꾸부리고 꼬마가 신발끈을 매는 것을 도와준다. 땅위에 놓은 람프불이 그림자와 함께 별을 그리고 있다. 피에르는 신발이 무겁고 옷이 차겁게 느껴졌다. 이불이 벗겨진 침대에 자꾸 눈길이 간다.
『자, 가자!』
그들은 밖으로 나왔다. 석탄흙이 발밑에서 바삭바삭 소리낸다. 마을집들의 반쯤 열린 문앞을, 그리고 소리없이 열리는 카텐앞을 지나간다. 이 광부촌이 오늘밤 온통 뜬눈으로 새고 있는 것이다.
열두살난 앙드레가 앞을 걷고있다. 마치 배(船) 모양 도사리고 불끈쥔 두주먹을 포켈속에 푹 찌르고있다. 옷깃을 치켜올린 채 어깨를 탁폈다. 어떤 폭우라도 아니 어떤 무서운 소식이라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이. 늙은 끄레망은 한손에 람프를 들고 또한 손으로 피에르를 잡고 그 뒤를 따른다. 어린 소년은 개발처럼 희색이며 생기없는 울통불통한 손을 꼭쥔다. 그 거치른 손에서 단 한군데 보들보들 한곳은 오른손 둘째 손가락에 매듭하나가 떨어져나간 곳이다. 사나운 기계가 잘라먹어 버린 것이다. 페에르는 가끔 떨어져나간 손가락 생각을 한다. 그걸 어떻게 했을까? 어느날 피에르는 끄레망에게 그것을 간직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라면 꼭 그것을 둬둘텐데. 난 크면 말이야…)
이들 주위에 지평선이 둘러쌓여있다. 머리위에 용광로같은 아침해가 묵묵히 검은 금속같은 밤하늘에 차차 처리해가고 있다. 어린 피에르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이엄청난 행위를 지켜본다. 불빛군사를 사방으로 풀고있다. 구름진지를 속히 걷어치운다. 잠미빛 군대가 어두운 성벽을 공격하더니 무질서하게 퇴각한다! 피에르에게는 하늘의 군데군데 뚫린 구멍사이로 눈이 가득찬 헛간이 보이기도 한다.
찢어지는 듯한 싸이렌 소리가 잿빛공기를 뚫고 지나간다.
『끄레망! 저 소리를 들어봐요!』이상한 목소리(어른 목소리)로 앙드레가 말한다.
『그 사람들이 나왔나봐요!』
싸이렌이 또 한번 울리는 바람에 들리지는 않았으나 늙은이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글쎄』
다시 조용해지자 끄레망은 계속한다.
『…그속에 내가 두번이나 내려갔다왔다』
『무슨 소리야?』피에르는 혼자 생각했다. 『나도 아빠하고 탄광속에 두번 내려갔다 온걸. 참 재밋더라. 운반차가 있고! 말이 끄는 조그만 기차… 내가 크면…』
소년은 등을 돌리고 있는 어머니를 알아보았다. 조명등이 높이 비치는 속에 꼭 닫친 철책앞에서 꼼짝않고 서있는 슬프고 검은 군상이 있었다. 그속에 끼어 그 여자는 누구보다도 검고 누구보다도 서글프게 보였다. 언제나 부지런하게 움직이던 그의 하이얀 손이 지금은 철책을 움켜쥐고 움직이지 않는다. 앙드레는 묵묵히 어머니 옆에 와선다. 여자는 『앙드레!』한마디 하고는 눈길을 돌리지도 않고 팔을 벌려 어린 피에르를 더듬는다.
그를 가슴에 꼭 껴안고 얼굴을 쓰다듬어준다. 이 신선하고 탄력있는 어린 몸, 헝클어진 머리칼을 만지며 여자의 눈에서 두 줄기 눈물이 흘렀다. 여섯시간전부터 이 차디찬 철책하나를 사이에 두고 죽음을 대하고 있던 그 여자는 이때까지 눈하나 깜짝않고 서있었던 것이다.
저편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수염난 사람, 샤쓰바람인 사람, 또 코안경을 쓴 사람들이 이리 저리 뛰기도하고 또 큰 소리로 떠들기도 한다. 피에르는 한눈을 감고 그들을 겨누어 너덧사람을 쏘았다. 탕·탕·탕. 그리고 나서 하품을 한다. 호주머니에서 백묵을 꺼내 쇠기둥 밑에 의미 모를 숫자를 적었다. 흰색으로 온통 칠하고 나서는 검은 돌을 줏어서 다시 글자를 검게 칠한다. 그리고 나서는 지루해서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피에르!』
한얀 손이 부드럽게 그의 입을 다물게 한다. 차거운 손은 철책냄새가 났다.
『그래두 엄마…』
어린애는 어머니 얼굴을, 그 주위의 많은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마치 석고상처럼 눈도 깜짝않고 다만 콧구멍만이 살아있는듯 했다. 그 시선들의 최면술에 걸린듯 그는 잠속에 빨려들어갔다. 높은데서 차거운 눈으로 감시하고 있는 조명등대와 검은 어머니 사이에 누워서 눈, 하이얀 눈…소년은 벌써 꿈나라로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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