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학자요 신비사상가였던 프란치스꼬 김익진 선생이 그가 평소 원하였던대로 공현일인 지난 1월 6일 하오2시에 동방의 3학자(三王)들 뒤를 따라 천국에서 아기 예수님을 조배하러 영원의 세계로 떠나셨읍니다.
아직 더 활약할 수 있고 또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남겨둔채 64세의 생애를 마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광대」라 불리웠던 앗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에게 반해서 가톨릭에 입신한 그는 앗씨시 성인을 닮은 점이 많았읍니다. 회갑을 지난해에 한 눈이 실명되고 남은 한 눈의 시력마저 미약하여 고생했던 최근 3년의 생활은『인오상중의 성 프란치꼬』를 연상케했읍니다.
이제 유명을 달리한 그 생애를 추모하면서 그가 우리 가운데서 풍긴 훈훈한 정과 주고자 애썼던 그 사랑! 소리높이 외치던 바를 되새겨 보기로 합니다.
1906년 음력으로 4월 18일 전남 목포에서 이조말에 강원순찰사와 무안감리등 관직을 역임한 김성규 옹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한악과 보통교육과정을 마친후 대전중·서울 중앙고보·일본 早稻田중학교를 거쳐 중국으로 건너가 北京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는 한편 학생운동에 가담하여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넓은 중원천지를 무대로 젊음의 정열을 쏟기도 하였읍니다.
그 자신『나는 지식의 쓰레기통』이라 했듯이 그는 여러 방면에 걸쳐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였고 일가언을 할 수 있는 식견이 있었읍니다. 많이 읽은 여러 책들 가운데 앗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부기가 있었던 것이 매개가 되어 가톨리시즘에 관심을 갖게되고 성 프란치스꼬를 연구하게 됨으로써 은상적순례끝에 마침내 가톨릭에 귀의하게 되었읍니다.
1936년 골룸바노 회원 파드릭 모나한 신부에게서 성세를 받고 교회의 자녀가 된 그는 이른바 지나사변으로 시작하여 태평양전쟁으로 줄달음질 치던 일본군국주의의 가톨릭탄압 정책이 한층더 혹심하였던 광주교구의 교회일을 위하여 그가 할 수 있는일, 특히 섭외사무를 자진 즐겨맡아 동분서주하였고 엄친의 서거로 그에게 배분된 선대의 유산 토지가 많이있는 전남 장성으로 1940년 이사를 가게되었으며 이 지방에 성당을 건립하였읍니다.
1945년 8월 15일 민족해방후 그는 사회정의를 위해 죽음과 물불을 가리지않았던 학생시절의 열정이 가슴에 다시 용솟음침을 느끼어 조국사회를 바로잡는데 참여코자 정계에 진출해 볼 포부도 가졌으나 혼란하고 착잡한 정치현실에 실망하고 선대의 고향인 경상도로 돌아오게 되었읍니다.
선생은 소유지를 자진 농지개혁을 하여 소유인들에게 나눠주고 살던 집에 남은 일부의 토지는 양지의 교회에 헌납한 다음 맏딸은 이미 대구로 출가하고 아들 둘 딸넷의 8인 가족을 거느리고 1948년 가을 대구로 이사하였던 것입니다. 프란치스꼬성인의 청빈을 본받아 재산에 관심이 없고 그가 가졌던 재산은 모두 남을 위해 써버린 다음인 대구에서의 생활은 청빈! 그것이었읍니다.
1949년 왜관 순심 김천성의중학교의 교감으로 교육계에 몸을 바쳤으나 6.25의 전란으로 교편을 잡지못하고 당시 필자가 편집과 경영을 맡고있던 가톨릭시보의 편집동인으로서 약3년간 무보수의 봉사를 하였읍니다.
학교와 교회의 부속건물들은 모두 군용으로 장발되고 거리는 피난민과 판자집으로 붐비던 당시의 상황 가운데서 가톨릭시보는 사무실과 책상하나도 없는 적빈이었지만 한국가톨릭교회의 유일한 정기간행물로서의 사명때문에 희생과 고초를 기쁘게 감수하면서 간행을 계속하였던것 인데 이 정신적인 힘을 북돋아 주고 또 외신의 번역을 담당하여 주심으로써 도와주신 이가 야인 선생이었읍니다. 그후 경주 근화여자중학 교감으로 3년간 다시 교편을 잡은 일도 있으나 1955년 이후는 문필생활로 일관하였읍니다.
현 대주교님의 요청으로 우리말로 번역된 레지오 마리에의 첫 교본인「레지오 마리에 직무수첩」이 1956년 목포에서 발행되었고 그가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동서의 피안」이 1661년 가톨릭출판사에서 간행되어 판을 거듭하고있고 편역인「동방문화와 공교」가 1965년 6월 왜관 분도출판사에서 간행되었으며「동서의 피안」적편이라 할 수 있는「내심락원」이 1966년 4월 성바오로출판사에서 발행되어 호평을 받고 있읍니다.
그의 호는「청당」「대구야인」「화산인」등 여럿인데 최근에는「매심」을 즐겨 사용하였다 합니다.
허례와 가식을 싫어하는 소탈한 성격인 그는 아이와 같이 천진하였고「휴매니스트」였읍니다. 그리스도교문화의 토착화를 누구보다 앞서 주장해 온 그는 천재와 선각자들이 그랬듯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인이었읍니다.
그 여러 행적을 여기다 들출 수는 없으며 그 선의의 모든 일들은 모두 천국의 황금책에 기록되었을 것이며 이제는 그에대한 영원한 보상을 받으실 것입니다
주여 저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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