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그리스도교의 서양사대주의를 통박하고 가톨릭의 초월성을 역설하던 故 김익진 선생의 명역「동서의 피안」「내심락원」이 한국교회의 동적 사고방식의 귀의와 토착화에 생기를 불어넣어준 것은 사실이다. 이 글은 선생이 가장 아끼며 천주님께 바친 명애 예수의 작은자매회 데레사 화영(일본宣敎) 수녀에게 보낸 서한으로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신비를 추구하면서도 동양사상의 유연한 사색의 경지에 입각한 선생의 말년을 엿 볼 수 있을 것이다.
1969년 9월 27일 화영아!
추석 이튿날 아침 어제 불던 큰 바람이 자고 고요한 밝은 아침이다.
벵쌍얀 두 작은형제 편에 보낸 차 봉다리와「드롭프스」통과 부사산용암 두덩이를 편지와 함께 잘받았다.
차는 어제아침 차례상에 처음으로 봉지를 따서 할아버지 할머니 연도상에 다려 바치고 어제 하루 온종일 그 나머지 차를 마시면서 고요한 시간을 누리고 지냈다.
이 편지를 쓰는 이 시간에도 부사산들을 앞에다 놓고 있을만큼 이 돌에 대한 나의 감상은 헤아릴 수가 없다. 이 돌 하나를 줍기까지 너의 고생이 어떠하였던 가를 상상할 때 가벼운 작은 용암 한덩이가 나에게는 부사산 전체의 크기와 무게를 느끼게 한다.
또 이들을 주은 부사산 절정에서 내려다보던 해돋이의 장엄한 광경을 상상할 때 네가 받은 영적 감격을 한 가지로 느끼게한다. 올라갈수록 지치는 다리에 스스로 매질을 해가며 오르고 또 오른 나머지 그 절정에 올라 해돋이 광경을 맞이하게 된것처럼 너의 마지막 코스인 사막에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을 나는 확신하고 그때에는 사막의 모래와 돌과 소금을 아비에게 보내줄 것을 기대하고있다. 그때까지 앞으로 2년동안 너의 고생많은 앞길을 오주 예수께서 끊임없이 비추어 주시고 부축해 주십사 간절히 빈다(下略)
차 신부님께 가는 환갑축하 편지는 너의 어머니가 너에게서 온 겉봉으로 반가워서 개봉을 한채로 갖다드렸더니 착하신 차 신부님께서 양해하시고 고맙게 받으시더라.
69년 12일 X일
너희들이 놀러갔던 그 화원의 관음당 한 구석에서 성모상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기이하고도 재미있는 희한한 경험이었다. 성모상앞에서 관세음보살에게 드리듯이 향을 피우고 신사참배할 때의 예법으로 손바닥을 딱치고 고개를 숙여 기도하는 그들 양장의 일본아주머니들의 모습을 상상할 때 나는 미소를 금치못하였다
너의 일문 편지는 놀랄만큼 잘되었으나 약간 손질을 해야만되겠다. 한달에 한번은 그와같이 일문으로 편지를 써보내면 그것을 내가 고치고 또 관련있는 단어를 보태서 적어 보내마. (中略)
감정이나 정서의 과잉은 지성을 흐리게한다. 즉 감상주의에 빠지지말라는 말이다. 지성이 흐려지면 판단을 그르치기 쉽다.
공자의 말씀에 애이불상이라, 즉 슬픈 마음이 일어나도 마음에 상처를 입지않는다는 뜻인가 보다.
죄없이 무참하게 운명하신 아드님의 시체를 안으시고 내려다보고 계시는 통고의 성모상을 너는「로마」에서 보았을것이다. 미시란젤로의 그걸 작은 바로 애이불상乙 우리에게 실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미로서의 슬픔을 성모님께서는 그와같이 억제하실 수 있었다. 자식으로서 부모가 그립고 한국인으로서 모국이 그리운것은 나무랄수없는 떳떳한 심정이다 그러나 너는 너의 직장에 파견된 선교사의 성소를 완성해야 하지않느냐! (中略)
나는 항상 노여움이라는 감정을 억제치 못하여 생활의 실패자가 되고 말았다. 나라와 부모와 동기간에게 쏠리는 그리움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히는 포로가 되지 말기를 너에게 새삼스러이 신신 당부한다.
나는 작년 이때에 비하면 혈압이 많이 내리고 식사도 잘하고 잠도 잘자니 날마다 갈멜에까지 걸어서 왕복할 수 있을 정도이다.
요새는 밤마다 한시간씩 시조 읊기를 배우고 있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가지가지 걸작시조들을 아름다운 곡조에 맞추어 목소리를 길게빼기도하며 떨기도하고나면 마음이 유쾌할뿐 아니라 심호흡으로 내장운동이 되어 소화에 도움이 된다. 이리하여 나는 밤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시시로익히는데 온정신을 쓰고있으니 비로소 나는 보람을 느끼게되다.
「學而時習之면 不易熱好」(배워서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않을소냐)라는 공자님의 말씀을 뼈저리게 느낀다. ?가 주의 은총이니 너의 신공덕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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