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에 다니는 사람은 기도를 열심히 해야 된다는 소리를 늘 들을 것이다. 그리고 기도가 잘 안 된다는 솔직한 고백을 늘 하게 될 것이다. 사실 기도한다는 것은 공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공부한다는 것은 배운다는 것이고 배운다는 것은 시도 때도 없는 것이며 아무리 배워도 얼마나 배웠는지 자기 자신도 도무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회갑이 지날 때까지 배웠다 싶어도 남들 어린이가 배우는 것을 또 배워야 되기도 한다. 공부는 어렵다. 철들어서 배우기 시작한 다음부터 죽을 때까지 한시라도 고삐를 늦추지 말고 늘 노력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부가 어려운 것의 또 하나는 공부해봤자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배운다는 것은 인생을 뜻있게 사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모든 사람이 다 박사가 돼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각자 자기의 처지에 따라 자기 능력껏 배움 없이는 살수가 없다.
기도하는 것도 공부에 비겨서 생각하면 어느 정도 기도고민이 풀릴 것이다. 공부가 인생에 귀중한 것이라면 기도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귀여운 시기는 뭐니 뭐니해도 어린이 시절일 것이다. 어린이들은 천진난만하여 어버이들에게 매달려 늘 청구하기 때문이다.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의 불행 중 불행은 그들이 기도할 수 없다는데 있다. 이렇듯 필요한 기도가 잘 안 된다. 어렵다. 기도만 하려고 하면 분심잡념이 드는 등 신앙생활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기도가 무엇인지, 기도는 어떻게 언제 하는 것인지를 다시 생각해보면 다소 안심이 될 것이다. 우선 우리는 기도하고 있다는 자각을 가지지 못하는 것을 깨우쳐야 한다. 기도는 공부하는 것과는 달리 흔적이 남지 않는다.
기도는 많은 학자들이 그 정의를 내리면서 하느님과의 대화, 하느님께 드리는 요청, 하느님께 마음을 올림 등으로 규정하였다. 다 옳은 규정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기도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기도하느냐이다. 기도하는 사람은 우선 하느님을 믿고 마음속에 모셔 들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희망을 가져야 한다. 또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세는 어린이와 같이 순진해야 한다. 어른이 순진해지기 위하여는 겸손한 마음을 길러야 한다. 겸손한 마음이 없으면 기도를 해도 기도가 아니라 자기선전 자기 과시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진정한 기도를 올릴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기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모 마리아, 천사들, 성인성녀들처럼 기도하지 못한다고 낙심하지 말자. 우리는 그저 지친 나그네처럼 도움이 필요하여 하느님께 청하면 된다. 시간을 정하고 성당에 가서 다소곳이 합장 장궤하고 기도드리지 못하여도 부엌에서 일하며 직장에서 사무처리 하며 내 자신을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그리고 곱고 미운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느님의 축복을 빌자. 그러면 기도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청순한 마음가짐이다. 청순한 마음은 하느님과 직통한다.
기도에는 묵념(默念)기도와 구송(口誦)기도가 있고 구송기도에는 독송(獨誦)기도와 공송(共誦)기도, 그리고 전례기도가 있다. 묵념기도는 눈을 감고 하느님께 대한 상념에 잠기는 기도를 말하며 구송기도는 정해진 기도문을 외며 바치는 기도이다. 묵념기도이든 구송기도이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고 인간으로서의 애절한 말씀을 드리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기도라면 구약성서의 이스라엘사람들을 따라갈 수 있는 예를 찾아볼 수가 없다.
구약성서를 잘 읽어보면 온통 기도로 짜여져 있다. 특히 시편은 인류의 기도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말로 기도했고 행동으로 기도했다. 그들의 생활자체가 기도였다. 시편을 읊고 단식과 재계를 지키고 한 것은 모두 하느님께 바치는 애절한 기도였다. 기도는 하느님께 마음을 바치는 희생이고 재계는 하느님께 몸을 바치는 희생이다.
이렇듯 기도와 재계로써 하느님께 열성적이었던 구약시대의 하느님의 백성을 위선으로 타락시킨 것은 바리사이파 당파였다. 그들은 사두가이파와 대결하면서 율법준사라는 미명하에 기도와 재계를 자기과시의 위선으로 타락시켰다. 회당이나 한 길가에서 기도하는 것이 나쁜 일일 수는 없지만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보라는 듯이 사람들이 많은 곳을 찾아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사람으로 보이며, 직업적인 기도인으로 자처하고 단식하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단식하는 표를 밖에 드러내는 것은 위선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라는 뜻으로 기도하는 사람, 단식하는 사람으로 자처했고 이것을 남에게 보였다.(바리사이라는 말의 본뜻은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이었고 지금은 위선자라는 뜻으로 쓰인다).
예수께서는 기도할 때에도 단식할 때에도 남모르게 하라고 하셨다. 깊은 한 숨을 내쉬어야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온통 얼굴을 찌푸려야 재계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한숨과 찌푸린 얼굴은 하느님이 좋아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억울한 자 도와주고 묶인 자 풀어주고 굶주린 자에게 나눠주고 헐벗은 자 입혀주는 것이 기도하는 진정한 모습이다.(이사58장5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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