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예수 자신의 아버지일뿐아니라 모든 사람, 각 사람의 아버지시라는 것이 예수의 하느님에 대한 계시의 핵심이다. 예수는 하느님을「아빠」(Abba)라 부르면서「나의 아버지」라는 표현은 예수가 하느님 아버지와 맺고 있는 유일무이한 관계 즉 친아들로서의 관계를 나타낸다. 사람들이 하느님과 맺게되는 관계는 선택에 의한 입양관계이다. 『하늘에 게신 아버지』는 악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하느님이고 하늘과 땅의 주인이다.
「아빠」의 보편적 사랑
하느님을 아버지로 알아 모신 예수의 참신한 태도는 하느님을『아빠』라 부르면서 그분께 간구한데서 드러난다(마태11.25):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지하실 수 있으십니다』(마르14.36). 어린 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애정과 신뢰 속에서 부를 때에 사용하던 이 호명은 그 당시 유다인들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예수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합당한 태도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마르10,15: 루가18.17)고 권유한 것과도 관련 있다. 유다인들이 불경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와 친숙한 부자관계를 맺고자하시는 하느님을 예수는 「아빠」호칭기도문으로써 계시하였다.
예수는 신적 부성(父性)의 보편성과 독특성을 철저하게 보여준다. 유다인들에게는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하였고 이스라엘을 당신백성으로 선택하셨으므로 아버지이지만 하느님이 만인의 아빠이며 모든 이가 서로 형제라는 결론에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비가 만물 위에 부어진다고 생각하였으나 이스라엘의 의인들만이 그 자비를 누릴 수 있다고 부언하였다.
그런데 예수의 아버지는 한계를 모르는 자비로써 모든 이를, 특히 미소한 자들을 사랑하신다. 하느님의 호의는 모든 사람에게 미친다. 그분이 죄인에게 먼저 회개를 요구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분 자신이 죄인에게 마주가심으로써 그를 회개시키려고 아무 유보 조건 없이 자비를 베푸신다.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가 인간의 행업, 자격, 조건을 앞지른다. 그분은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써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바리사이파의 하느님은 우리를 앞서가지 못하고 겨우 우리 뒤를 따라 다니는 더딘 하느님이다. 인간의 회개, 선행, 율범 준수에 의해 마음이 움직이어 그것들에 준하여 은혜를 베푸는 인색한 신이다. 인간의 처신과 조건에 좌우되는 무능하고 예속된 신에 불과하였다. 이같이 그릇된 신 이해를 혹평하면서 예수는 자비와 은총을 베풂에 있어서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과 자유를 역설하였다. 하느님은 인간의 조건과 처신에 구애받지 않고, 간청하기도 전에 필요한 것을 자유로이 베푸신다. 차별과 제한을 모르는 아버지의 사랑은 악인에게까지도 변함없이 미친다. 죄까지도 그분의 사랑에 한계를 설정하지 못 한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신다』(마태5,45).
아버지의 자유
하느님의 자비는 선하거나 악한 인간의 조건 또는 행업에 좌우되지 않고 어떤 것에 의해서 제한받지도 않으며 그분의 선하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참으로 선하신 분은 오직 한분 아버지뿐 아시다』(마태19.17). 그분의 선은 특히 죄인들을 위한 자비에서 두드러진다. 방탕한 작은 아들과 맹종적인 큰 아들을 슬하에 둔 아버지 (루가15,11이하)의 선하심은 자식들의 바탕이나 불만에 찬 반항 그리고 체면에 의해서도 전혀 동요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에 의해서 더욱 돋보인다. 하느님은 근본적으로 선하고 자비하시기 때문에 자비와 선의 빛을 스스로 발하신다. 세상의 어느 것에 의해서도 제한받지도 동요되지도 않는 하느님은 자신 안에서 확고부동하시고 변함이 없으시다. 하느님의 불변성은 움직이지 않는 부동, 열정이 없는 무감동을 뜻하지 않고 변덕이 없고 자신 안에 확고히 계시면서 자유로이 선을 베푸는 자비를 의미한다.
자비를 베품에 있어서 하느님이 삼으시는 기준은 인간의 선업에 앞서서 행하시는 당신의 자유이다. 자유로운 하느님은 인간의 노고에 대하여 후하게 보답하신다. 그래서 그분의 자유는 인간의 타산이나 예상을 훨씬 넘어선다. 포도원의 주인(마태20,1~16)은 빈둥거리며 서 있는 일꾼들을 고용하는데서 부터 자비를 보인다. 약속된 일 삯을 노동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모두에게 후하게 베푼다. 넉넉히 품삯을 받고도 늦게 일터에 나온 동료들보다 더 많은 품삯을 자신에게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일꾼에게 그 주인은 자신의 자비와 자유를 강조 한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요?』(마태20,14~16). 하느님은 홀로 선하시므로 자비롭고 또 온전히 자유로이 선과 자비를 베푸신다. 그분은 지상의 어느 것에 의해서도 제한받지 않고 당신의 온전한 자유 안에서 만사를 다스리는『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바람은 제가불고 싶은대로 분다』(요한3,7). 하느님은 바람처럼 자유로우시다.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는 전폭적 신뢰와 완전한 순종이다. 순종은 신뢰에서 나온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자비와 선을 확고히 믿었으므로 전적으로 신뢰하였고 하느님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였기에 온전히 순종하였다. 「아빠-하느님」에게 보여준 그분의 절대적 신뢰와 순종은 하느님의 자유를 신뢰하고 승복한 결과이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완전히 모방할 수 없을 그분의 이 신뢰와 순종은 그분이 아버지의「친아들」임을 입증한다. 하느님을「나의 아버지」라 부른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도「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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