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7월21일 이른 아침 제물포(濟物浦)를 떠난 한때의 낯설은 행렬이 백여리 가도를 따라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말 타고 앞서가는 서양신부를 선두로 가마 네 채와 짐을 가득 실은 열필 말이 총총히 따르는 행렬이 연도 마을을 지날때마다 구경꾼들이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줄줄이 뒤를 따른다.
『아니 저 가마에 탄 여자들 좀 보게. 무슨 여자들이 이 더위에 까만옷을 입고 청승이람』
가끔 서양인들을 보아온 연도주민들인지라 앞서가는 서양신부 모습은 그런대로 눈에 익었지만 드리운 포장이 흔들릴 때마다 조금씩 보이는 가마 안에 네 여인의 모습은 확실히 이색적일수밖에 없었다.
『빳빳한 흰수건을 썼구먼 얼굴이 뾰얀게 곱기도 해라』
『말 타고 가는 서양사람 마누라들인 모양인가』
일행이 연도 구경꾼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던지는 소리를 들으며 길을 재촉, 정오쯤 제물포 서울 중간지점인 「오리골 주막거리」(현 영등포구 오류동 원호병원앞)에 도착하여 주막에서 간단한 점심 요기를 할 즈음 『고깔 쓴 서양여자 지나간다』는 뒤따라온 소문에 귀가 번쩍한 주민들이 가마를 둘러싸고 또 한마디씩 던진다
『머리에 쓴게 수건인가 고깔인가?』
『중이 쓰는 고깔같은게 거참 곱게도 생겼구먼』
『그래 꼭 고깔 쓴 천사 같은데』
-고깔쓴 천사-
이들은 당시 조선교구장 블랑ㆍ백 주교 초청으로 서울에 있던 고아원과 양노원을 돌보기 위해 개국 이래 이 땅에 처음오는 불란서 「샬뜨르 성바오로 수녀회」소속 조선 파견수녀들이었다.
본부 소속 불란서인 「자카리아」 「에스멜」수녀와 월남 사이공 분원 소속 「프란체스카」 「비르지니」 네 수녀는 조선 첫 파견수녀로 선발되어 전날 제물포에 도착하여 중국인 여인숙에서 일박한 후 서울교구 경리「뽀아스넬ㆍ박」신부 안내로 서울로 향하는 길이었다.
일행이 오후 5시쯤 한강나룻터를 건너 삼개(마포)에 도착하자 이번엔「하늘의 선녀」같은 수녀 온다는 소식에 마중나온 교우 수백명이 목을 길게 뽑았다.
이들은 제물포까지 출영 나가겠다는걸 혼잡할까 봐 주교가 말려 마포에 주저앉아 몇시간째 기다리고 있었던 것.
이윽고 「검은복장에 길다란 목주를 옆에 차고 머리엔 눈같이 하얀 수건을 쓴 수녀들의 청초한 자태」가 나타나자 일동은 눈이 황홀하여 어떤 이는 허리굽혀 깊은 절을 하는가 하면 성호를 긋는 여인네들.
이후 근 한 달 동안 서울 신자들은 무슨 큰 경사나 지내는 기분이었고 어디를 가나 수녀얘기가 화제였다.
『수녀를 보았오. 어떻게 생겼습디까?』
『발등까지 덮은 긴 복장에 커다란 고상이 달린 목주를 옆에 차고 흰수건을 어깨까지 내려쓴 것이 사람같지 않고 선녀같습디다』
『그런데 수녀들도 우리처럼 음식을 먹는지…어떻게 깨끗한지 조그만 티도 없답디다』
어떤 여교우는 가만히 수녀 뒤로 가서 의복이나 목주를 만져보곤 두고 두고 자랑을 하고 다니기도 했던 순박한 풍경.
블랑ㆍ백 주교는 교회가 차차 안정을 얻어가자 1880년부터 버려진 고아 노쇠자 구제사업에 착구, 5년후엔 서울 「곤당골」(현 을지로 1가 미대사관 서측)과 「똥골」(관철동)에 기와집 두 채를 마련, 고아와 노쇠자 1백40여 명을 수용하고 있었다.
20여 명 교우들이 이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워낙 이런 일에 경험이 없는지라 경비가 많이 들어 운영에 적잖은 어려움이 따랐다.
백 주교는 1883년 7월8일 일본 「나가사끼」에서 있은 자신의 주교성성식 후 이미 그곳에 와있던 수녀원을 돌아보고 구제사업을 수녀들에게 맡길 의향을 품어오다 1887년 7월 불란서 「샬뜨로 성바오로 수녀회」에 공한을 보내 수녀파견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 요청을 받은 수녀회 원장은 쇄도하는 지원자 가운데 앞의 네 수녀를 선정, 두 불란서 수녀는 그 해 6월3일 「마르세이유」항을 떠나 29일「사이공」에서 두 중국인 수녀와 합류 7월20일 제물포항에 첫발을 딛었던 것.
서울에 도착한 이들은 정동현 이화여고 앞에 있던 「뽀아스넬ㆍ박」신부집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일에 착수했다.
그런데 이들이 있는 집에는 여교우 여럿이 있어 시중을 드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 명동에 있던「꼬스트ㆍ고」신부가 아침에 미사를 드리러 왔다 가는길에 그날 할 일을 통역해 주곤 했다.
헌데 이 지시외 다른 할일이 있어 손짓 발짓이 통하면 다행이지만 그도 안될 경우 무엇을 할지 모르는 여교우들은 만만한 부채나 들고 수녀들 생긴 모양이나 넋잃고 쳐다보다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부채질을 정성껏(?) 해댔으니 뜻은 고마우나 꽤 귀찮은일이었으리라.
블랑ㆍ백 주교는 조력자 양성을 위해 원장 「자카리아」수녀에게 예비수녀 모집과 동정녀 양성 두 방안을 제시하자 수녀는 조선인 수녀 양성도 그들의 임무임으로 예비수녀 모집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이에 백 주교는 전부터 보아둔 金해 계계미(마리아ㆍ17) 김순이(마리아ㆍ16) 金복우지(마리아ㆍ16) 박황오리(끌라라ㆍ16) 네 소녀를 추천 7월30일 입원식을 가졌는데 이때 풍경을 박황오리 수녀(수도명ㆍ방지거 사베리오)는 그가 쓴 「수녀원의 사기(史記)」에서 이렇게 적었다.
『원장과 다른수녀 앞에 살풋이 주저앉아 얌전히 머리를 땅에 숙이고 조심하여 일어났다가 다시 무릎을 꿇고 앉는듯 마는듯 또 다시 일어서는 큰절을 정숙히 함으로써 입원식을 마쳤다』
그 중 하나는 과부의 외동딸이었고 하나는 무남독녀로 많은 지원자들 가운데 뽑힌걸 기뻐하면서도 육친의 정을 영원히 끊게되는 이별에 눈물을 뿌렸다.
「고깔 쓴 천사」로 뭇사람 시선속에 고아원 주방일부터 세탁까지 억척스럽게 해내던 원장 「자카리아」수녀는 과로와 장티부스로 1889년 2월3일 46세로 선종했고 한국인 첫수녀들도 1966년 3월18일 95세를 일기로 선종한 박 황오리 수녀를 마지막으로 모두 세상을 떠나 용산 수녀원 묘지에 잠들어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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