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시보 작년 12월 14일자 사설「외국선교사에게 말한다」를 흥미있게 읽었읍니다. 필자가 한국에서 일하고 공부해 왔으며 또 장래에도 계속하려고 마음먹고 있는 한 외국인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설중『외국 선교사들은「크리스챠니즘」을 한국의 전통과 문화의 특수성에 적응시켜 보다 더 한국적이 되면 될수록 더 큰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한다』는 귀절은 특히 인상깊었읍니다.
이 구절을 잠깐 음미해보고서 저는 이 구절이 외국 선교사들의「파라독스」를 참 잘 표현한 구절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읍니다. 신학적인 견지에서 인「파라독스」의 한쪽 면을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바로 성사, 즉 세상에 대한 구원의 표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우리 각 개인에게 있어서나 공동체로서의 우리 모두에게 필연적으로 가시적(可視的)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알 수있게 되고 또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교회에 대한 앎은 들음에서 옵니다. 『그래서 신앙은 설교에서 오고 설교는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옵니다. (로마서 10장17절)』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을 설교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 이게 바로 선교사들이 외국에 오게 되는 이유입니다. 여기 한 가지 중요시해야하는 점은 선교사들에 의해 설교되는 이 말씀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활동하시는 분은 그리스도 혹은 차라리 그리스도의 성신이십니다. (누까12장12절참조) 외국인으로서 이야기할 자료, 말할 수 있는 어떤 말씀(가장 풍부한 의미에서의 말씀 즉『행동은 말보다 더 힘차게 말한다』의 경우에서 처럼)이 있는 한에서만 외국인을 위한 자리가 마련됩니다.
그러나 외국인의 봉사-한국에서나 세계 어디서나-에도 한계가 있읍니다. 무어냐하면 그 외국인 자신에겐 말씀이 제시해 주는 적응이나 말씀이 요구하는 변화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다만 한국인들만이(혹은 차라리 그들을 인도하시는 성신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교사가 설교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성신만이 하실 수 있는일, 즉 그 설교뒤 말씀이 진짜 의미하는 말씀이 되도록 하는 일을 달성하려고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자기자신의 사고 방식을 강요하는 바로 여기에 선교사의 끊임없는 유혹이 깔려 있읍니다.
또 아마 여기에 교회역사를 통해 뭇 선교사들이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심리학적 및 인류학적 견지에서 우리는 앞에서 말한「파라독스」의 다른 한쪽면을 볼 수 있는데 이역시 성신에 의해 인도되는 한국인들만이 적응과 변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되는 것입니다. 제 자신의 경험에 대해 말씀드리므로써 제가 무엇을 하려는 가를 설명하겠읍니다.
여기 미국에서 저는 많은 한국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읍니다.
저의 나라에선 외국인 그들로부터 받은 인상 하나가 있읍니다. 뭐냐하면 완전히 자연스러워진다는 것 완전히 미국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그들이 깨닫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담화로부터 시작해서 미국「유머」에 불편을 느끼는 점에 이르기까지 여러가지 모양으로 드러나고 있읍니다.
미국사람들이 이 사실을 잘 이해함에도 불구하고 그 한국인 자신은 항상 더욱더 미국인다워지려고 노력합니다 그가 얼마나 많이 혹은 적게 좌절감을 맛보는가는 그가 얼마나 미국인처럼 되는데 성공하는가 혹은 결핍한가에 달려있읍니다.
어떤 한국인도 결코 완전한 미국인은 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깨닫는건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 누구에게나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중요한 건노력하는 걸 중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노력이 중단될 때 한국인들은 자기들 주위에 하나의 울타리, 한국인들은 미국사람들과 상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미국인들에게 주게되는 그러한 울타리를 쌓게됩니다.
제가 그리고 있는 평행선은 꽤 선명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한국인 다워지려고 노력합니다.
적어도 처음에는 말입니다. 아니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최소한의사소통은 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한국인이 된다는건 불가능하므로 얼마간의 기간이 지나면 이러한 노력은 점점 어렵게 되어버리고 결국 기진맥진 해지고 맙니다. 조금씩 조금씩 우리는 노력하는걸 포기해 버리고 한국인들을 찾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 은둔처 사적(私的) 조그만「게토」에로 후퇴해 버리게 됩니다. 심리학적 견지에서 볼때 이런 현상은 이해할만 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람직한 현상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한국 및 한국인들에게 가능한한 활짝 자신을 개방시키려고 항상 노력을 계속하는 게 우리 외국인들의 의무입니다. 이건 일생을통한 우리의 과업입니다. 우린 가능한한 동양인이되고 한국인이 되려는 노력을 포기할 수 없읍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는 건 결국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항상 깨달으면서도.
제가 이야기한「파라독스」의 양쪽면은 앞에서 말한 사설의 원의와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외국인들은 일하고 설교해야 하지만 들은 것을 성신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화(行動化) 해야하는 분들은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일입니다. 결코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못한다는 걸 항상 알면서도 그래도 좀 더 한국인이 되려고 항상 노력하는 그런 투쟁을 외국인들은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정말 하느님이 우리 생활에서 주인이 되시도록 해드리고 그분의 뜻대로 그분이 우리에게 활동하시도록 해드리는것보다 우리에게 더 위대한 신앙의 증거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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