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혼자 살수도 없고 남과 같이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인생의 희비가 여기서 발생하고 바로 이 때문에 종교적 교훈이 필요하다. 남과 함께 살면서 어려운 일들이 많지만 그중 하나가 내 눈에 남의 잘못이 비치는 일이다. 남의 잘한 일은 그것을 인정하기까지는 오랜 세월과 예리한 관찰 분석이 필요하지만 남의 잘못은 금방 눈에 들어온다. 참 요상한 일이다。그런데 나도 상대방에게는 남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사는 사회는 온통 남과 남이 모여서 살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여튼 잘못은 고쳐져야 하고 다스려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다행이도 외적으로 드러나는 물리적 과실은 법으로 다스려진다. 그런데 법이 미치지 못하는 그 숱한 잘못들, 사람의 신경을 박박 긁는 잘못들, 부모 자녀들을 갈라놓고 형제지간을 갈라놓고 우애를 짓밟는 잘못들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여기에는 사실 효과적인 치료제가 없는 것이다. 서로가 잘했고 서로가 잘못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고전 전한서(前漢書)는 이 치료약으로 「남의 공은 기억하고 과실은 잊어라」라고 하였고 서양의 격언은 「남을 고쳐준다고 잘못을 지적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이 열 번 더 낫다」라는 훈고를 하고 있다. 그만큼 어렵다는 이야기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나라에서는 이 문제가 없도록 근본적인 치료제를 제시 하였다. 우선 하느님나라는 혼자 사는 나라가 아니고 여럿이 함께 사는 나라이다. 그리고 그 여럿은 남과 남의 모임이 아니고 「너와 나」의 관계를 이루는 나라이다. 여기에서는 남을 탓하고 교정하는 따위는 있어서는 안 된다.그러니 남의 잘못을 보고 그 잘못이 내 잘못도 되지 않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남을 판단하지 말라. 남을 단죄하지 말라고 하셨다。사람의 겉 잘못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은 법이 할 것이고 속 잘못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일은 하느님이 하신다. 그러니 남의 잘못이 안타깝거든 판단하고 단죄하려 들지 말고 먼저 자기잘못을 고치는 것이 구제의 첩경이다. 남의 잘못을 판단하면 나의 잘못도 판단 받아야 된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고 그 판단의 척도는 내가 남을 판단한 그 척도가 될 것이다. 내가 남에게 얼마나 심하고 가혹한 판단을 했는가를 생각하면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을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견양하여 하시기도 했고 당신 제자들을 보고 하시기도 하였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준수에만 굳어진 나머지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는데 눈에 등불을 켜고 있었다. 제자들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앞으로 하느님나라를 건설할 사람들이다. 「남에게는 삵괭이 눈, 자기에게는 두더지 눈」이라고 라 퐁땐느가 빈정대었지만 자기에게 후하고 남에게 심한 것은 결국 같은 악습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세 가지 짧은 비유로써 즉석에서 납득시키셨다。들보만한 가시가 눈에 들었는데 남의 눈에서 티를 꺼내주겠다고 하는 것은 만화이다。들보 같은 자기의 잘못이 티 같은 남의 잘못보다 더 작게 보이는 사람, 이 사람은 인간성에 문제가 있다。예수께서는 이런 사람을 위선자라고 하였다. 무릇 예수의 복음을 전할 사명을 띤 제자들은 우선 자기 눈의 티를 들보처럼 생각하고 그것을 먼저 꺼내야 티끌이든 들보든 남의 눈을 고쳐줄 수가 있다。「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는 우리의 격언도 있지만 자기를 보지 않으려고 하는 눈은「소경 더하기 악」하여 악소경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비유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1소경이 소경을 인도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만화적인 풍경일 것이다. 개천에 빠진 소경이 개천을 나무란다지만 제 스스로 소경인줄 모르고 남을 구덩이로 인도해 놓고 구덩이가 그르다고 나무라면 무엇 할 것인가.
라면 무엇 할 것인가.
쇠귀에 경 읽기, 소경에게 설악산 구경시켜주기, 귀머거리에 교향곡 들려주기, 이런 것들은 헛수고 말라는 경구로 쓰이지만 악심먹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거룩한 것을 욕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앙심을 품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그의 잘못을 타이르면 그는 돌아서서 침을 뱉을 것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 그것들이 발로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 것이다』 개와 돼지는 여기서 누구를 견양한 것인지 학자들은 해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를 지적한다고 하기도 하고 마태오 18장 17절을 들어 복음말씀을 듣지 않는 세리나 이방인을 가리킨다고도 하고 배교자들을 가리킨다고(베드후 2,21~22)도 한다.
하여튼 거룩한 것과 진주는 복음말씀임에 분명하고 개나 돼지는 이 말씀을 안 들으려고 귀를 틀어막고 안 보려고 눈을 가린 자들을 말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에게는 복음 말씀이 저들에게 던지는 돌이나 마찬가지이다. 용서하고 주어라. 이것이 복음전달자의 모토이어야 한다. 하느님은 용서하고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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