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아버지이시지만 비할 데 없이 존엄하시다。『하늘과 땅의 주인』(마태11、25) 이고 왕(마태18、23)이며 심판주이시며 모든 것이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의지에 달려있다(마태20、23)。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비유와 행적들로써 하느님이 누리시는 사랑의 주권을 계시하였다。치유기적、용서、미소한 자들과의 상종 그리고 보물의 비유(마태13、44)、혼인잔치의 비유(루가14、15)따위는 인간의 행업과 자격에 훨씬 앞서가는 사랑의 주권을 보여준다。 심판의 비유들(마태25장)과 종말설교(마태24장)는 선에 보상하고 악을 처벌하며 인간 각자의 삶을 심판하는 하느님의 권능을 가르친다。하느님의 주권은 당신의 절대적 자유 안에서 선과 자비를 베푸는 부성에서뿐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는 섭리 및 인간에게 능력과 일을 부여하고 최종 셈바치기를 요구하는 심판에서도 드러난다。
세심한 섭리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예수의 신앙은 하느님이 만물을 세심한 배려로 보살피신다는 말씀들(마태6、26~30?10、29)에서 나타난다。 심판과 종말 설교에서도 하느님이 우주의 주재자로서 묘사된다。 그것들은 하느님의 전능을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세밀한 것들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가지신 아버지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촉구하는 구절들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신다』(마태6、32)。우리 일상생활의 사소한 필요에 까지도 지극한 관심을 가지신 하느님이다。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셨다。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마태10、30~31)。 온 우주의 하느님으로서 창조계 전반에 걸쳐 미치는 그분의 선은 우리가 구원뿐 아니라 현세생활까지도 그분에게 위탁할 수 있는 신뢰의 바탕이 된다。 자연은 하느님의 애정어린 관심과 섭리를 이해시켜 우리로 하여금 그분에 대한 신뢰를 가르치는 교사이다。 또한 파괴와 불의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권한을 각성시켜주는 표지이다.
심판주
하느님은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12、35이하)처럼 각 사람들에게 적합한 능력과 함께 사명을 맡기고 당신에 대한 순종과 충성으로 사람들이 맡은 일을 다 한데 대해 후한 보상을 내리고 불충한 자들에게는 심판관이시다。 보상에 후한 만큼 처벌에도 엄중하시다。 하느님은 인색한 분이 아니라 각자에게 충분한 능력을 주고 능력에 맞갖은 사명을 부여하신다(「탈란트의 비유」: 마태25、14이하)。능력에 적절한 일을 맡기고 일한 대가를 지불함에 있어서 하느님의 자비가 일관되게 작용한다。그 자비는 인간의 계산과 기준과 상상을 훨씬 능가하는 자유에 근거한다(마태20、15)。
심판의 기준은 계산하는 인간의 수학방식이 아니라 하느님이 당신 자유로써 베푸시는 후한 자비이다。 공포에 몰아넣고 전율케 하는 판정이 아니라 하느님 당신과 사람들 사이에 또한 인간들 사이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심판이다。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한3、17)。인간의 겉모양을 보지 않고 그 은밀한 데까지 통찰하는 즉 인간의 마음까지 다스리는 주인、『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마태6、6) 하느님은 인간에게 항구한 충심과 복종을 당당히 요구하신다。
이 요구 역시 후하게 베풀고 너그럽게 대하시는 그분의 자비에서 나온 것이다。
자녀들에게 조건 없이 넉넉히 베푸는 부모 홀로 그들에게서 순종을 요구할 수 있다。하느님만이 인간의 주인이다。
아들의 파견
하늘과 땅의 주인으로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만물위에 권능을 행사하는 초월적인 분인 동시에 우리를 사랑하고 당신을 부자관계로써 우리에게 얽매는 하느님이다。
그분의 선、성성、완전성은 인간을 위한 자비와 용서로 나타난다。 그분은 하늘의 주인으로서 고고히 높은 곳에 계셔 내려다보기만 하지 않고 세상 안으로 내려오신다。 그분은 어느 곳에도 얽매이지 아니한 자유로운 분이지만 예수 안에서 자신을 제한시키신다。 그분의 무한한 자유는 인간을 위한 자기 제한에서 최고로 표현된다。 그분은 부단히 자녀들에게로 내려오기 위하여 당신 아들을 파견하신다。
예수는 하느님을 『나를 보내신 아버지』(요한5、37:6、44:16、5·28:20、21)라 부르면서 자신을 아버지에게서 파견된 자로 소개하고 아버지에게 전적으로 의존해 있는 자기의 처지를 설명한다。 「파견」은 파견하는 분과 파견되는 분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파견된 자는 파견하는 자에 의존해 있으면서 둘은 권한에 있어서 일치되어있다。 물론 파견의 주도권은 파견하는 자에게 있지만 둘은 권한에 있어서 동등하다。 아버지에 의한 아들의 파견은 사명 수행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요한3、16)。 예수의 파견됨은 아버지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외아들이므로 그분의 파견됨은 사랑 넘치는 아버지의 자기양도이다。
하느님은 아들을 통하여 당신을 인간에게 내어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배려하셨고、아들 안에서 그분은 당신을 내어줌으로써 인간에게까지 내려와 가까이 계시며 더욱이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신다?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느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겠습니까?』
(로마8、32)。파견된 아들을 통한 하느님의 자기양도는 십자가 사건으로써 구현되고 절정에 이른다。 전적으로 자유로운 인격은 그가 사랑하는 자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위하여 자신을 제한한다。 이것이 자기극복이며 자아초월이다。참 자유는 이 자아초월에서 입증된다。하느님의 자기양도는 당신을 초월하는 자유의 능력을 입증한다。 『하느님은 당신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원치 않으시고 당신의 이득이 될 어떤 것도 바라지 않으시고 그분이 바라시는 것은 인간의 이로움과 참된 위대함과 궁극적 품위이다。 인간의 행복만을 바라시는 하느님이시다』(H·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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