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의 사명은 무엇인가』 평신도의 손에 의해 창설된 한국교회는 선교3세기를 앞두고 평신도들의 적극적이고 봉사적인 사도직 활동이 강력히 요청되고 있다. 본보는 제22회 평신도의 날을 맞아 세계적인 신학자 발터 카스퍼 주교의 논문 「교회와 세계에 있어서의 평신도의 사명」을 소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평신도들의 사명과 역할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 논문은 평신도의 사명에 대한 문제를 교회 역사적 관점에서, 특히 공의회의 정신에 의거하여 취급하면서 현대교회와 현대 사회 안에서의 평신도의 위치를 제시하고 있다. 지난 87년 10월 「Stimmen der Zeit」지에 실린 이 논문은 부산교구 물금본당 이경우(가브리엘) 주임신부가 번역했다. 본지는 2회로 나눠 소개한다. <편집자 주>
오늘날 교회 내에 신도의 시기가 왔다고 하는 주장은 그다지 큰 몽상은 아니다. 이제까지도 교회 내에는 남여 신도의 사명이 있어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새삼 특수한 양상으로 현실적 문제가 되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사제의 부족상황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오늘날 세상에서 함께 책임지로 함께 일한다는 이념과 실천이 점차 중시되었기 때문도 아니며, 혹은 교회의 민주화 요청에 근거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외적 요인에 불과하다. 내적 이유는 교회가 이전보다 자신을 좀 더 명백히 또 깊이 의식하게 되었고, 오늘의 세계에 파견되었음을 스스로 이해하게 된데 있다. 이러한 과정은 제2차 바티깐 공의회와 함께 성령의 표지(標識)로 알아들을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성령의 표지(標識)를 실제로 이해해 왔느냐?』고 물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교회의 실생활에 있어서 그 성령의 표지에 올바르게 대응해왔던가? 이 점에 『그렇다』라고 대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 않을진대 특히 여성 측의 불만과 비판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이 주제를 가지고 시노드(synode)도 가질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떤 대표적 신학사전에서 「신도」란 낱말에 「신도=성직자의 항을 참조」라고 간단히 설명할 수 있던, 그런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그간 많은 것이 변화되었다. 신도의 증대된 참여는 특히 공의회 이후의 교회에서 볼 수 있는 매우 기쁜 표지이다. 그러나 성직자와 신도와의 정확한 관계는 제2차 바티깐 공의회나 새 교회법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만족한 설명이 되지못한 채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공의회를 겨우 수용하기 시작한 것에 불과하다.
세례 받은 이의 사명
이 문제는『신도란 무엇이냐? 신도는 누구냐?』란 질문으로 시작된다. 일반적 용법으로 보아서 신도(Laie)란 사정(事情)에 정통하지 못한 사람, 전문가가 아닌 사람, 프로가 아닌 자라고 이해된다. 이 말은 이와 같이 부정적이며 옛 부터 사용되어왔다. 이 말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90년경 로마의 끌레멘스에 의해서인데, 그는 이 「Laicos」(신도란 뜻)란 서품으로 구별되지 않은 자, 따라서 선택된 입장에 있는 성직자에 속하지 않은 자를 의미했다. 그 배경을 이루는 고대의 어법에서는 「Laos=民」은 보통사람, 즉 서민을 의미했으며, 지도적 권력층·교양인과는 구별되는 소박한 사람들을 의미했었다.
그 이후 그리스도교 용어에서는 신도를 순전히 부정적으로, 성직자나 수도자가 아닌 사람들로 표시한다. 다만 성직자와 수도자들만이 완전한 신분의 사람들이라고 되어있다. 교회는 그와 비슷하게 일방적으로, 성직자들과 교회위계를 동일시하는 편이다. 이에 반하여 신도는 다소간 수동적 지체, 즉 사목적 배려의 대상으로는 취급될망정 교회 내에서의 책임 있는 주체로는 인정되지 못하고 있다. 약간 조소적이긴 하지만 신도의 지위는 성목요일에 수도원 성당 품속으로, 축복하여 그 털을 깎이는 어린 양에 비길 수 있다. 그러므로 오해를 일으키는 신도의 개념을 버리고 교회 용어에서 없애버리자는 제안이 나올 법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신도」의 개념을 그리스도교적 의미로, 즉 신학적으로 책임 있는 내용을 가지고 이해하고자 하면, 세속적 용법과 구별해서 신도란 말의 그리스도교적 의미내용을 찾아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즉「Laos=民」의 원시적, 신학적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Laos」는 구약성서에서는 희랍어에서의 서민이란 의미와는 달리 「Ethne」, 즉 이방인과 구별되는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란 뜻이었다. 이런 이해에서 보면 「Laicos=신도」란 특별히 부르심을 받아 선택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하느님의 백성에 속한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신도란 세례로 인하여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들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베드전2.9)을 일컫는 존칭이다. 이러한 일반적 의미로 말하는 신도의 개념은 제자·형제성도·그리스도인·그리스도신자라고 하는 성서의 개념과 같은 의미 내용을 갖는다.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다함께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분별선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여러 가지 신분 사이에, 즉 성직자와 신도, 수도자와 세속에 사는 그리스도인 사이에 그어질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 그어져야 한다. 모든 신앙인, 세례 받은 이들이 근본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은 그 후에 생긴 온갖 구별-그것이 아무리 중요한 것일지라도-을 선행하는 것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통용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을 결집시킨 이 공통점을 다시 부각시킨 것은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의 위대한 업적이다. 즉 공의회는 교회헌장에서 하느님 백성 전체를 다룬 독자적 장을 마련하여 성직위계의 장과 협의로 본 신도의 장 앞에 놓았다. 그리고 이 장에서 다루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된 사명과 파견, 세례 받은 모든 이에게 공통된 사제직에의 공동참여,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직, 사제직, 왕직에의 공동참여이다.
이와 비슷하게 수도자에 관한 장 앞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된 성성(聖性)에의 부르심에 관한 특별한 장이 마련되어있다.
이로써 확실해진 것은 각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적극적, 책임 있는 멤버라는 것이다. 모든 이가 영적 존재이다.
교회란 우리 모두를 말한다. 따라서 세례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에 위탁된 유일한 구원사명에 참여한다. 즉 성사가 되는 것, 세상 구원을 위한 표지와 도구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신도의 사명으로 다음 두 가지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교회의 건설과 교회의 사명에 협력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꼭 짜여져 있다.
신도와 사제의 구별
물론 이와 같은 서두의 설명을 가지고는 부족한 점이 많다. 이것은 이제 다루고자 하는 성직자와 신도, 수도자와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과의 구별을 위한 기초에 불과하다. 교회는 처음부터 형체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전체적으로 조직화된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다양하고 풍부한 카리스마와 직무와 봉사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회와 그 공동체는 처음부터 하나의 몸, 즉 각 지체가 전체에 대하여 고유한 임무를 가지고 있는 한 몸이란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고린전12.4~31참조). 여기서는 각자가 모든 것이 될 수 없고, 모든 이가 모든 것을 가질 수도 없는 것이다. (고린전12.4~31참조).
모든 이가 하나가 된 연후에 비로소 전체가 될 수 있으며 전원의 일치가 하나의 전체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요한 아담 묄러의 말마따나 가톨릭교회는 「위에서의」성직자의 교회도 아니며 「밑에서의」신도의 교회도 아니다. 그것은 조직화된 서로 구별되는 전체이며 살아있는 친교실현이다.
세례 받은 모든 이의 공통사제직에 대한, 그리고 공통된 책임에 대한 성서적 교의는 특히 베드 전2.5~20과 묵시록1. 6 : 5. 10에서 명백히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교의는 교부시대부터 스콜라 전승기에 이르기까지 압도적 반응을 보였었다. 리옹의 이레네오에 의하면 모든 외로운 사람은 사제적 위계에 속한다. 이 점은 특히 전례에서 나타나는데 거기서 전체공동체를「Plebs sancta=거룩한 백성」이라고 했으며, 크리소스토모는 주교의 사제적 완성이라고 했다. 교부들, 스콜라학파, 트리엔트공의회에 의하여 살펴보아도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과 사제의 봉사를 통해서 봉헌하는 것은 신앙인 전체가하는 것이라고 되어있다. 마태16.19의 수위권에 대한 해석에서, 아우구스띠노는 교회전체가 열고 닫는 천국열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카르타고의 치브리아노에 의하면, 교회 내에서 백성 전체의 동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고대 교회에서는 신도전체가 책임을 졌는데, 특히 직무가 선출에서나 공의회에서 신도가 맡은 역할에서 그것이 잘 드러났었다. 그 신학적 근거는 모든 이가 받은 성령의 도유(塗油), 그리고 신도의 신앙감각(Sensus fidei)의 교의가 그것이다. 그리고 죤헨리 뉴만 추기경은 1859년 유명한 「신앙사정에 관한 신앙인의 질문」이란 논문에서 『4세기의 아리안파에 의한 위기에 직면하여 참 신앙을 끝까지 고수한 것은 주교들이 아니라 신앙대중이었다』라고 갈파한바 있다.
교회의 역사와 신앙의 역사가 흐름에 따라서 교회의 친교구조와 모든 신앙인의 공동사제직은 발전하기도 했지만 매우 가끔 무시되거나 망각되기도 했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역사상의 원인이 작용했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4세기의 콘스탄틴에 의한 전환이라고 보인다. 그로인하여 그리스도교는 제국 내에서 공인된 종교가 되었고 후에는 국교가 되었다.
그 결과 그 시대의 군중은 교회에도 쇄도해 들어왔으며, 그리스도교는 본연의 추진력을 상실했다. 주교들은 제국의 고위관리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으며 제국의 모든 특권이 그들에게 주어졌었다. 성직자와 신도 사이는, 교회 내에서의 신학적 분별에서 사회적 구별로 전환되었다. 즉 고위성직자들은 유력한 지배적 입장에 서게 되었고, 대다수의 신도들은 「단순한」민중이 되었다. 나아가서 중세초기에는 교육받는 특권이 성직자에게 주어졌었다. 이렇게 카리스마와 권력이 자주 불행한 형식으로 혼동되어갔다.
교회가 이렇게 「세속화(世俗化)」되고 「부르조아화」됨에 대하여, 수도자들은 이미 일찍부터 이의(異議)를 제기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본연의 숭고한 이상을 높이 평가하여 그것을 철저히 살고자했었다. 고대교회의 유명한 주교들이나 동·서방교회의 교부들이 모두 수도원 출신이며 그들은 교회 내에서 상당히 큰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물론 수도원 역시 특히 중세에 와서는 세속화의 위험 속으로 빠져들었었다.
그런데 11세기에 있었던 그레고리오 혁명과 성직서품권 투쟁 이후, 영적인 영역과 세속적 영역 사이에 또다시 명백한 구별을 짓고 자하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교회와 세속과의 본래의 구별이 이제 그리스도교 내에 잘못 도입됨으로 해서, 영적영역은 성직자들에게 보류되었고, 세속적 영역은 신도들에게 돌려진 것이다. 이것이 그라시아노 법령집 안에 있는 다음의 불길한 언명까지 나오게 했다: 『그리스도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것은 연적인 것과 육적(肉的·세속적)인 것이다』 교황 보니파시오8세는 그의 서간「Clericis laicos」(12960)에서, 신도들은 성직자들에게 전부터 이미 적개심을 품고 있다고 참으로 정중하게 말한 바 있다. 이런 발언은 직접으로는 교황과 황제나 프랑스왕과의 분쟁에 관해서 한 것이지만 역시 위험한 경향을 말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같은 분쟁이 많은 주교영역에서 거듭되었으며 영주인 주교가 그리스도인 시민에 대해서 싸움을 일으킨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미 중세초기에 그리고 근세에 와서 더욱 심하게 신도의 반성직자 운동이 일어나게 도니 경위는, 이런 배경에서 보면 이해가 간다. 성직자중심주의와 신도중심주의는 언제나 메달의 양면이다. 여기서 치명적인 것은 정치적 차원과 신학적 차원이 구제불능하게 서로 엉켜져있었다는 사실이다. 성직자들의 도구는 신학적인 것뿐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인 것까지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신도들은 정치적 요구뿐 아니라 신학적 요구까지도 투쟁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1215년의 제4차 라떼란공의회로부터 종교개혁자들을 반박한 트리엔트공의회에 이르기까지의 신학이 교회직무의 위치를 일방적으로 부각시켰기 때문에 이런 직무의 신학적 고정화는 어떻든 세속적 권력의 기구를 고정화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오해 내지 오용하게 되었다. 이런 여건 하에서 교회론은 더욱 더 위계적 교회론이 되어갔던 것이다. 교회의 이상상(理想像)은 목자 밑에 따르는 양떼, 혹은 장교와 병사들과의 관계라는 이미지였다. 그것은 피라밋 형의 교회구조였으며, 성서와 고대교회의 친교-교회론은 사라져갔다.
물론 주교들과 사제들이 그들에게 맡겨진 신자들을 착한 목자로서 대해주는 좋은 표양도 있기는 했다. 그 외에도 중세기의 신심에는 근세신심으로서-특히 토마스 켐피스의 준수성범은 유명하다-훌륭한 신도신심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롯떼르담의 에라스모의 토마스 모로는 이런 신도신심을 그 후에 다른 차원에서 발전시키기도 했다.
신도의 적극적 견해가 쏟아져 나온 것은 역시 근세후기에 와서 였는데, 즉 프랑스 혁명 후의 세속화에서 19세기 초에 이르는 시기, 결국에 와서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그때까지의 구라파문화가 국교제도와 더불어 붕괴된 시기에 그렇게 되었다. 이제 신도의 시기가 열렸다. 이제 성직자를 통하여 그리스도교가 세상 안에 침투하기는 이미 불가능하게 되었다. 오히려 많은 나라에서 성직자들의 활동은 상당한 제한을 받게 되었다. 예컨대 쾰른의 분규, 19세기의 문화투쟁, 독일 제3제국의 교회투쟁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래서 요한 아담 묄러나 죤헨리 뉴만 등의 일류 신학자들ㆍ요한 요셉 괴레스와 같은 활동적 가톨릭 신도·또한 빈첸즈 빨로띠나 아돌프 콜링과 같은 사목적 센스를 가진 실천가들은 세계에 대한 교회의 사명을 실천함에 있어 신도의 의의(意義)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이다. 교황 중에는 금세기의 비오 11세가 교회와 국가의 유착을 풀어서 성직자들을 정치영역에서 물러서게 했고, 그 대신 우선 1922년에 취임칙서「Ubi arcano」로써 신도사도직을 살렸다. 교황의 생각은 확실히 많은 면에서 이태리의 여러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와는 전혀 다른 독일의 상황에는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성직위계의 사도직에 신도가 참여한다」는 그의 선도적 이념은 신도를 그저 성직자의 보조적 역할자로 생각하는 위험, 신도의 상대적 고유역할을 오해하는 위험에 빠지게 했었다. 그렇기는 했지만 여기서 좀 더 중요한 새 출발이 이루어진 것만은 사실이다.
그 다음 1ㆍ2차 세계대전 동안에 신도의 신학이 형성되었다. 특히 중요한 인물로서는 이브 꽁갈ㆍ칼 라너ㆍ게하르트 필립스ㆍ프란즈 사비엘 아르놀드ㆍ한스 우르 폰 바르타살·에드와드 쉴레벡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의 신학에서 특히 두 가지 명확한 견해가 나타났다. 하나는 신도의 사명이 교계적 사도직에 특수한 방법으로 참여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세례와 견진에 뿌리를 박고 가정의 영역과 혼인성사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일들(노동ㆍ직업`정치ㆍ경제ㆍ학문ㆍ문화ㆍ스포츠ㆍ보도)은 창조질서에 의거하여 그 나름의 고유한 법칙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 법칙성을 그리스도교적으로 관철하고자 하면 이것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신도는 전문가이며 이에 반하여 성직자는 문외한이다. 이런 견해는 세상사에 대하여 신앙에서 직접 구체적 규정을 내리는 이제까지의 천편일률적 관점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그리고 신학적 통합주의내지 전체주의에 반하여 세상일에 대한 신도의 고유한 권한과 책임을 명확히 했다. 그리고 나아가서 신도들의 주체정립을 진격하게 했으며 이제 신도들을 사목적 배려의 대상으로만 취급한다든가 성직위계의 자유로운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밝히는 바는 근대의 세속주의는 많은 점에 있어서 상처도 받았지만 교회를 위해서는 상당히 적극적인 의미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교회는 비록 스스로 원한 것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쓸데없이 지워진 짐을 벗어버리고 세상의 제한에서 다시 세상 안에서 세상을 위하여 본연의 영적인 사명을 자유로이 행사하게 되었다. 신도의 신학적 사명의 재발견은 교회의 재탄생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의 신도의 사명과 종교의 자유 등에 관한 선언은 이런 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 공의회는 교회역사상으로 보아서 콘스탄틴 시대의 종식을 공적으로 고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런 단락은 아픔과 산고(産苦)없이는 불가능함도 명백하다.
공의회 이후의 교회에 일어난 여러 위기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된다. 그리고 또 한편 우리가 현재의 생활을 파국이 아니라 교회의 새 모습의 희망찬 새 탄생으로 보아야함도 확실한 일이다.
공의회는 새 역사적 형태의 지도이념으로 성서적 고대교회적 친교 교회론을 내놓았는데 그것은 카리스마와 직무 그리고 봉사라는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말하고 있다. 이 테두리 안에서 신도란 하느님 백성에 속하면서 하느님 백성 전체의 사명에 참여하는 그리스도 신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신도는 교회의 다음 세 가지 기본 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첫째로 마르띠리아(Martyria) 즉 신앙의 감각(Sensus Fidei=신자는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신앙에 관해서 근본적으로는 그르칠 수 없는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신념을 표명하는 교회의 전통적 용어-(譯註)에 참여한다. 둘째로 리뚜르지아(Liturgia)즉 전례의 축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셋째로 디아코니아(Diakonia)즉 예수그리스도의 왕직으로서 특히 형제·자매 또한 모든 사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봉사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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