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이와 같이 무죄하니 내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오』지금부터 20년전 2월 7일 얼어붙은 북녘 땅 외로운 감방 속에서 70고령의 한 외국성직자가 굶주림과 병고에 시달리면서 그래도 그를 학대하는민족을 위해 고요히 기도하는 가운데 숨졌다. 그가 최후까지 돌아가고자한 집은 덕원수도원이다.
동수도원의「아빠스」이며 함흥교구의 교구장 신 보니파시오 주교님은 1877년 독일「훌타」교구에서 태어나셨다. 경건한 부모 밑에서 전통적인 신앙교육을 받으신 그 분은 베네딕도 수도원에 들어가셨다.
1903년에 서품되었고 6년후인 1909년에 처음으로 한국에 나오셨다. 백년에 가까운 박해를 치루고 신앙의 자유를 얻어 새로히 발족한 한국교회는 날로 늘어나서 마침내 선교사의 부족을 가져왔고 증원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당시 한국교회의 교구장이시던 뮤텔 민 대주교님은 독일에서 외방포교를 위하여 새로 세워진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수족(修族)에게 한국의 진출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보니파시오 신부는 서울 혜화동(현재 혜화동본당 동성중고교 대소신학교가 들어선 자리)에 수도원을 세우고 교육사업으로 사범대학을 세울 작정이었으나 제일차세계대전과 일제의 압력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공업학교만을 세웠다.
시골 중심의 전교에 주력하던 그때의 벌써 보니파시오 원장은 한국 교회의 머언 장래를 바라보시고 처음에는 사범대학을 다음에는 공업학교를 세워, 일본의 식민주의적 문교정책으로 배움의 길이 막힌 우리 겨레에게 고등교육과 기술습득의 기회를 주고자 하셨으니 그의 선견지명에 새삼 탄복한다.
날로 늘어가는 교세를 빠리 외방전교회의 혼자의 힘만으로는 담당하기 어려워서 1920년에 함경남북도와 북간도까지를 수도회에 맡기게되었다.
그리하여 1921년 보니파시오 원장은 주교로 축성되고 초대 원산교구와 연길교구의 교구장으로 피명, 수도원을 원산 부근 인덕원으로 옮겼다. 그때부터 수도원의 신설과 교구건설이란 벅찬 책임을 감당해야만 하였던 것이다.
1928년 연길교구는 같은 베네딕도 회원인 백 주교님이 교구장으로 취임됨으로써 갈라져나갔지만 신 주교님은 함경 남북도 넓은 지역에 복음의 전파를 위하여 본당을 새로이 세웠음은 물론이요 국민들의 기초교육을 위해서 국민학교를 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해방후 의무교육이 실시된 지금에는 문제도 안되지만 그 당시로서는 민족개화를 위하여 큰 공헌이 아닐 수 없다. 덕원 수도원에는 소신학교와 대신학교를 세워 원산교구 평양교구 연길교구의 신학생을 양성하였고 현대시설의 농장의 경영과 목공소 철공소 발전소까지 지었으며 병원을 차려 가난한 이에게 의료봉사를 해왔고 양로원을 지어서 무의무탁한 노인들에게 안식의 자리를 마련하여 주었다. 또 인쇄소에서는 호교서적과 교리문답 미사경본 기도서 성서 등을 해방당시까지 순한글로 찍어내어 신심의 앙양은 물론이요 국문의 유지와 보급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일본의 군국주의가 만주를 거쳐 중국대륙으로 침투하려는 격동기여서 정치적으로 어려운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지만 신주교님의 높으신 덕망과 뛰어난 외교수완은 어려움을 무난히 극복할 수 있었고 교회의 발전에 큰 방해를 받지 않았다.
이리하여 주교님이 처음 교구를 맡으셨을 때는 원산에 본당이 하나 있었을뿐이나 그후 신고산, 원산, 덕원고원, 영흥, 함흥, 서호진, 북청, 성진, 청진, 회령, 경흥 등에 본당이 세워졌고 교세는 발전일로에 있었으나 공산정권이 수립되면서부터 우리교회는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외국은 물론이요 남한과의 교류마저 온전히 끊어져 외부로부터의 아무런 원조도 없이 이 모든 본당과 사업의 운영을 수도원 자체에서부터 책임을 져야했으니 그 어려움이 어떠하였는지는 주교님만이 아실 것이다.
북괴들은 처음에는 양의 가죽을 쓰고 어느정도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듯 하였지만 날이갈수록 탄압 의도를 더하였고 마침내는 이리의 속이 들어나 수도원과 각 교회와 기타 모든 기관을 다 몰수하고 외국인 수사신부, 방인 신부까지도 모두 체포하여 연금시키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1949년 5월 9일 운명의 시각이 닥쳤다. 한밤중에 정치보위부원 몇명이 수도원에 찾아와 구속장도 없이 행방도 가르침이 없이 주교님을 끌고 나갔다.
그때에 주교님은 72세의 고령으로서 지병인「아스마」가 심하여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쇠약한 몸이었지만 붉은 이리때들은 사정도 없이 그대로 캄캄한 밤중에 트럭에 싣고 어디로인지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때에 따라가서 간호하기를 자청한 수사도 있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주교님께서 자식들에게 마지막 강복을 주시고 자기 후임자를 정하시고 무거운 걸음으로 힘없이 끌려가시던 모습은 너무도 애처러워 아직껏 잊을 수가 없다. 그 후 주교님은 원산을 거쳐서 평양 감옥 특사에 혼자 갇히게 되었다.
나는 요행히도 주교님의 거처를 알아내어 몰래 위로의 문안과「아스마」를 위한 약을 사서 보내드렸지만 효과도 없이 1950년 2월 7일 새벽 위대한 사도의 영혼은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주교님은 평양에 오신 후 소위 그들의 재판을 받고 반동과 스파이 죄로 5년의 언도를 받으셨으며 그분이 갇힌 방은 4방육척도 못되는 좁은 방으로서 불결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주교님은 보기에도 흉한 남색 누비옷인 죄수복으로 갈아 입으셨고 소금 양치질은 할 수 있었지만세수는 연중 한번도 허락되지 않았으며 난방장치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이 그 추운 겨울을 고스란이 견디어야만 했다. 우유니 빵이니 겨란은 상상도 할수 없 는 이야기다. 일반 죄수가 먹는 소량의 음식으로 연명 하셨으며 그러다가 지병인「아스마」가 더욱 악화한 위에 심한 영양실조까지 겹쳐서 인간의 힘으로는 더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교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 몇일 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담당 의사에게 하신 것으로 전해진다.
『설사가 심하고 가끔 의식을 잃는다』『몸을 조금 움직여도 아파서 잠을 이룰 수가 없다』『오래 누워있으니 사방이 헐어서 고통이 심하다』『나는 어린아이와 같이 무죄하니 내집(덕원 수도원)으로 가게 해다오』『이러한 사정을 정치 보위부 부장에게 전하여 다오』
『내 집에 가게 해달라』는 이 말씀은 그전에도 여러번 외치셨다니 주교님 생각에는 당신은 비록 무서운 학대를 받고 있지만 나머지 가족을은 아직도 덕원 수도원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착각하신 모양이다.
모든 독일인 수사 신부가 다 잡혀갔고 수도원은 해산되며 김일성농과대학으로 바뀌었고 교회는 몰수되고 한국인 수사들이추방된 사실을 전혀 모르고 계신모양이다. 한국에 나오신지 40여년간 이나라 백성에게 복음의 전파와 개화를 위하여 젊음과 사랑과 힘을 다 바치신 그분에게 해방과 더불어 국가 최고의 훈장은 달아드리지 못할 망정 반동 스파이로 몰아서 옥에 가두고 굶어돌아가시게 하다니… 우리 겨레는 무슨 낯으로 천국에서 주교님을 뵈올 수 있을까?
그러나 순진하시고 끝까지 착하신 그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운명하시기 직전에 하셨듯이『성부님 저들은 그 하는 짓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쇼』하시면서 숨을 거두셨을 것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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