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시보 2월 22일자 선교사들의「파라독스」를 읽고
먼저 예수회 정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작년 12월 14일자 본지 사설에대해 그많은 선교사중 유독 한분만이 느꼈고 거기에 대한 반응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만리 이국땅에서 오로지 한국민족에 복음화를 염두에 두고 계신 정 신부님의 정신이야말로 숭고한 선교정신이라 아니할 수 없읍니다. 현대는 대화의 시대라고 합니다. 진정한 뜻에서 충언을 침묵으로 묵살해버린다는 것은 우리가 결코 바라는 바 아니었읍니다.
12월 14일자 사설에서 선교사의 노고에 대해선 재삼사의를 표했기에 여기서 재론하지 않겠읍니다. 다만 방인 사제로서 외국형제 사제들에게 보다 복음적인 것이 무엇이냐하는 점을 말하고 싶은 심정에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람직한 선교사상은 어떤 것인가?
첫째 우리가 아무리 입으로만 토착화를 부르짖고 거의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한국적인 관습에까지 통달했을 망정 여전히 외국인으로서 남아있는 선교사가 있읍니다. 반면 아무리 언어가 서툴고 모든 한국적인 관습 풍속에 어긋나는 선교사일지라도 참으로 토착화한 선교사가 있을 수 있읍니다. 요는 외국 선교사의 한국화는 형식이나 외적 문제를 떠나서 근본적인 정신자세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즉 정 신부님 자신이 말씀하셨듯 문제는 그 사고방식에 있다고 봅니다. 인위적인 어떤 값싼 기교나 방법으로 그 민족을 다스릴 때 부작용은 큰 것입니다. 둘째 선교사들은 비록 입으로 한국화니 심지어「우리 한국사람」이라고 일컬을지언정 어느 결정적인 계기에 가서는 한국에 대한 상대적인 의식 즉 외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이나 긍지를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뿌리 깊이 잠재된 좀체로 체질개선이 어려운 생리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어떤 이국인이 한국사람이 되어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천주님이 정해주신 자연적인 조건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바라고 싶은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선교사 자신들이 우리마음에 심어달라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든다면 필자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이북 원산에서 오랜세월을 노동하시다가 북괴에 쫓겨 지금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성베네딕또회 노수사 몇 분을 만났습니다.
만나자마자 알지도 못하는 저를 다만 한국신부란 이유로 거치른 손으로 덥석 끌어안고『나 한국 가고 싶어요. 나 한국 사랑해요』하며 눈물이 글성거리는것 을 보고 가슴이 아프도록 고마웠던 일이 기억납니다. 이밖에도 참으로 한국인에게 형제적인 우애를 느끼게하는 선교사는 얼마던지 있읍니다. T교구의 S양 같은분. 요는 선교사로서 투철한 사람은 그리스도 정신에 투철한 사람이요 그리스도 정신에 투철한 사람은 따라서 훌륭한 선교사 노릇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선교사는 비록 눈이 푸르고 얼굴이 희더라도 그 선교지의 백성과 완전히 동화되고 융화될 수 있는 한국화, 토착화된 외국인일 것입니다.
고로 우리가 요하는것은 한국말을 잘해라 한국옷을 입어라 숫가락과 젓가락으로 밥을 먹어라 그런것이 아닐것입니다.
한국사람의 부정직, 사회의 부패상을 보고 통분하여 욕지거리를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욕설은 한국민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에서 터져나와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정 신부님이 말씀하신 미국에 가 있는 한국사람이 자연스러운 미국인이 되기 위해서 불가능하다 하셨고 또한 한국에 와 계시는 선교사들 역시 힘에 지쳐 때로는 자기나름의 생활로 움추려든다고 하였는데 이 두 사정에 있어 동화되고 싶어하는 동기부터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봅니다.
외국인이 선교사로서 왔을 때는 정복하러 온 것입니다.
선교사로서 정복하러 온 사람들은 그리스도 사랑에 정복되지 않고는 결코남 을 정복 못할 것입니다.
한국사람이 미국에 가서 동화되려는 것은 약자로서의 생활방법입니다. 그것과 이것은 근본동기부터 다를줄 압니다.
넷째로 선교사들은 여기와서 일을 하지만 그 결과는 자기 당대에서 보기 힘들고 또한 그 결과가 보이지않는다고 한탄하실 것은 조금도 없읍니다. 인류 복음화의 구원은 영원 속에 이루워지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선교사들의「개토」생활입니다. 한국사람이 될 수 없다는 불가능성을 느꼈을 때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첫 발을 이 땅에 내려놓으면서 선교사 각자 나름의 담을 쌓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그 까닭도 선교사의 잠재된 우월감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근접기 어렵게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하는 모든 일 자체를 어떤 식민성을 가지고 애초에 믿지 않으려드는 인상조차 줍니다. 왜냐하면 인천교구를 뺀거의 모든 선교사들의 교구에서 과연 한국가톨릭출판물(가톨릭시보, 가톨릭청년, 소년경향잡지) 등의 구독현황이 어떠냐 하는 것입니다.
그럼 백보 양보해서 한국사람들의 가톨릭 정신이 부족해서 쓴 글이 좋지못하다고 인정하였다면 과연 얼마나 협조했으며 신문이나 잡지를 발간해서 과연 우리신앙의 발판이 될 수 있게 했는가?
결론적으로 선교사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투철한 그리스도 사랑에 의한 복음 전파, 언어나 민족의 우월감을 교회안에서 만이라도 지양해 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같이 하느님 안에 일치되었을 때 결코 우리의 언어나 피부색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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