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인습적 기독교의 종말과 성년기의 기독교
제2차「바티깐」공의회의 또하나의 혁명적 업적은 전통적, 인습적 신앙생활에 종말을 고하고 기독교의 본질에로의 복귀를 촉진했다는 것이다.
전통적 기독교국가에서의 신앙이란 하나의 문화적, 사회적, 가문적 유산으로 전락(轉落)하여 신자들의 대부분은「날 때부터의 신자」요 성년으로서 스스로의 결단에 의하여 신앙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신앙의 오묘한 신비는 사라지고 하루에 세 번은 의례 밥을 먹듯이 일상적 문화생활의 일부로서 무반성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이와같은 습관화한 신앙생활에서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일은 기대할 수 없었고 따라서 삶과 신앙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는「은총의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을 본질로 하고「감사의 공동체」라 불리우는 기독교회의 본질은 외면당하게 되었다. 기독교적 생활의 중심은 성체성사 즉「감사」의 성사요 참된 기독자(基督者)의 일생은 은혜로우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행위의 연속이다. 그러나일상적 신앙생활을 관찰할 때 많은 신자들이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란 언제나 청탁과 호소의 기도뿐이다. 그나마 입시(入試) 질병, 전쟁등 위급할 때에 국한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이와같이 무기력한 인간의 의지의 대상이며 욕구충족의 대상으로서만「필요한」신은 인류가 유아적(幼兒的) 무능력 상태에서 탈피하여 거의 과학적「전능」을 구가하는 성년기의 현대인에게는 그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의 신은 이제 사장(死葬) 되기에 적당한 것이며 또 실제로 많은 현대 지성들이 사신론(死神論)을 전개하고 있다.
인습적 신앙생활속에 나타난 신상은 아직 유아적 의타(依他) 상태에서 자연에 완전히 종속되어 자연현상에 대한 공포에 떨고 있는 원시종교의 폭군적 신상이다. 이러한 신상은 진정한 기독교의 신상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다.
인습적 신앙생활 속에 반영된 그릇된 신상을 진정한 기독교의 신상과 혼동함으로써 진정한 기독교의 신상마저 부정하려는 현대의「무신론」적 경향이 나타났다. 이는 교회의 사목적, 선교적 사명상 지극히 불행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의 하느님은 자녀들이 속히 성장하여 부모에 대한 유아적 종속 상태를 떠나 스스로 자립하기를 바라는 너그러운 아버지와 같다. 자기의 지배욕 소유욕을 충족하기 위하여 자녀의 성장을 가로막고 되도록이면 오랫동안 자기의 보호아래 두고저 하는 이기주의적 부모와 다르다. 올바른 부모들은 자녀들이 조속히 성숙하여 자기의 지배를 떠나 독립적 성인이 되기를 바란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인류가 성년기에 이르러 의타상태가 두려움, 무기력, 비굴함을 버리고 자신과 기쁨속에 자기에게 진정한 찬미를 바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마치 자녀가 진정으로 부모를 섬기고 사랑하고 감사하기 위하여는 오직 성년기에 이르러 부모에 대한 의존상태를 탈피하여 자립한 후에나 가능하듯이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감사드리기에는 유아적 의존상태를 떠나 하느님에 대한 필요성을 초월한 성숙한 인류에게서만 가능한 것이다.
좀 역설적일지는 몰라도 어느 신학자의 말처럼 심리적으로 신에의 의존을 벗어난, 다시 말하면「심리적 무신론자」만이「진정한 유신론자」, 즉 기독교신자가 될 수 있다.
기원 2세기의 성 이레네우스는 말하기를『하느님의 영광은 생동, 성장하는 인간이며 인간의 생명이란 곧 하느님을 뵙는 것이다』하였다. 이것은「그리스도의 신비」에 관한 사도 바오로의 언명에 대한 주석(註釋)으로서 모든 인류가 풍요한 인간생활 속에 성장하여 궁극적으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기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영원한 계획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기독교의 하느님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으로서 내가 하루 속히 성장, 독립하여 완성된 성년적 인간으로서 자기에게 성인의 감사를 드리기를 원하신다.
내가「위급」에 처하여 하느님이「필요」할 경우에만 할 수 없이 하느님께 기도한다면 나는 아직도 유아적 의존상태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기독자가 되기엔 아직도 성장의 시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교회관의 2류형
폐쇄와 개방
교회의 선교적 사명은 교회의 본질과 상관적이며 따라서 현대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이해함에는 공의회 이전의 교회관과 공의회 이후의 교회관의 차이를 이해함이 필요하다.
공의회 이전의 통속적 교회관에 의하면 교회는 구원의 지성소, 대피소 또는 요새에 비유할 수 있으며 따라서 교회의 사명은 교회밖에서 영원한 멸망의 위험속에 신음하는 인류를 되도록 많이 또 빨리 영세입교시키는 일이었다. 이와같은 교회관은 구원의 정신적 제과정을 물리적 실재로 간주하는 물질적 사고방식에 기초를 두는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였다.
첫째로 교회는 제도중심의 조직체로서 간주되어 행정적 체계, 교회법, 교계의 확립, 교세의 통계적 증가 등 외형적 완비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왔다. 특히 호교신학의 창시자 성 벨라르미노의 영향을 받아 교리의 자구적 순수성의 옹호와 교회권위의 절대성을 지나치게 중시하였고 이것은 나아가서 교회를 교황 및 주교들과 동일시하여 평신자는 교회의 성원이 아닌 것 같은 그릇된 인상을 주게 되었다. 또 선교방법에 있어서도 외방인 주교를 본 방인주교로 대체만 하면 교회는 곧 토착화된다는,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적이고 또 한편으로는 기계적인 안이한 사고방식을 야기시켰다.
둘째로 교회는 구원의 진리의 유일한 독점적 보관자로 자부하여 유태 및 기독교적 전통 이전 및 이외의 역사를 구원과 전혀무관한「속사」로 간주하는 독선주의의 과오를 범하였다.
교회는 따라서 교만과 편협에 사로잡힌 배타적 소수집단의 인상을 짙게하였으며 그 의도와 동기는 여하하든 외부에 표현된 교회의 생활태도는 교회의 본질에 속하는「가톨리시즘」(보편주의)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이었다.
교회의 이와같은 폐쇄성은 셋째로 교회를 자기중심적 집단으로 만들었다.
교회의 본령은 신중심적이요 인류를 신에게로 인도함이 그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자신을 신과 동일시하여 절대화함으로써 교회를 부정하는 사람은 신도 함께 부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된 것이다. 따라서 신은 교회가 옹호하는 특정한 인물 성격 문화양식 신학체계등 인간적 사고의 소산인 유한한 사물과 동일시되었고 신의 진정한 무한성은 왜곡되고 희생되었다.
자기중심적 교회는 넷째로 남에 대한 봉사가 아닌 자기봉사 자기신장에 신경을 집중하게되었고 당연히 이기주의에 빠지게되었다.
봉사받음이 아니라 봉사하러오사 세계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신 예수의 대변자임을 자처하는 교회가 자기봉사에 몰두하게 되었음은 큰 자기모순이 아닐 수 없다. 교회내에서 우리는 가끔 이런 질문을 듣는다.『이 학교는 교회를 위하여 무슨 유익한 공헌을 하고 있는가?』『이 병원을 경영하는 것이 교회에 대하여 무슨 이익이 되는가?』등 이러한 질문은 결국『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는 질문과 마찬가지이며 이것은 곧 집단적 이기심의 발로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교회의 자기신장에의 집념은 예를들어 교회경영의 학교에서 비신자학생들에게도 종교교육과 종교예식에의 참여를 강제하게 되었으며 이와같은 종교적 강요는 한편으로는 자유를 본질로 하는 인간의 존엄성과 이 존엄성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성의를 모독하고 또 한편으로는 불만을 품은 비신자학생들에게 반종교적 반신적 편견을 조성하게 된 것이다. 하느님이 인성을 취하여 사람이 된 이래 무릇 인간성에 대한 모든 위협은 곧 신성에 대한 위협과 동일하게 된 것이며 아무리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공의회 이전의 교회관이 폐쇄적 자기중심적 집단의 그것이었다면 공의회 이후의 교회관은 개방적 신중심적 공동체의 그것이다. 교회는 외계에 대립되는 구원의 요새가 아니고 외계에 개방되어 있는 구원의 표지이다. 구교회관이 물질주의적 사고에 기초를 두었다면 신교회관은 위격주의적 사고에 기초를 둔다. 구원의 대상은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은「몸」과 더불어「마음」을 지니고 있고 육체의 외면성과 더불어 정신의 내면성을 지니고 있으며 인간의 진정한 자아는 그의 볼 수 있는 육에가 아니고 볼수없는 정신적 내면성이다. 따라서 위격 대 위격의 교류는 오직 가견적 표지 즉 언어 미소 몸짓, 등의 중개를 통하여 가능하고, 또 표지의 의미는 오직위격만이 포착할 수 있다. 그런데 표지는 인간의 내면성을 계시하기도 하려니와 때로는 은폐, 왜곡하기도 하며 표지의 의미는 대화의 상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표지의 이러한 애매성으로 밀미암아 절대적 확실성 강제, 증명 등은 위격의 세계에서는 배제되며 그대신 확률, 설득, 신앙행위만이 남는다. 교회의 표지관은 이러한 위격주의적 사고방식에 기초하는 것이다.
첫째로 신교회관에 의하면 교회는 죽은 물건의 집합으로서의 제도적 조직체가 아니고 살아있는 위격의 공동체로서의 생명체이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세의 확립을 위한 제도의 완비, 통계학적 증가가 아니고 하나의 생명체로서 성장, 발전할 수 있는 여건및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생명체의 성장은 기계의 부속품과는 달리 외부에서 임의로 조작할 수 있는것이 아니라 오직 건전한토양속에서 시간의 경과를 통하여 내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체로서의 교회의 과제는 교세의 제도적 확장보다 기독교적 정신생활에 합당한 분위기의 조성이며 다시 말하면『교회를 심는』사업이다.
둘째로 교회는 독선주의자들의 고립된 폐쇄적 집단이 아니라 보편적 개방적 포괄적 공동체이다. 구교회관이 교회를 뚝으로 둘러쌓인 저수지로 간주한데 반하여 신교회관은 교회를주 위의 언덕, 산과 연결된 호수로 간주한다. 따라서 전자가 교회의 경계선을 명확히 획정하고 인류를 구원과 멸망의 두 집단으로 대별한데 반하여 후자는 이와같은 구별이 불가능함을 의식하고 모든 종파, 계층, 신분의 인류가 심지어는 신을 모르는 사람까지도, 그리스도의 구원사업과 성신의 내적 인도하에 있음을 강조한다.
셋째로 교회는 자기중심적 집단이 아니요 자기를 초월하여 인류를 신에게로 인도하는 표지가 된다. 스킬러백스 신부의 표현대로 교회는『인간과 신의 상봉의 성사』즉 표지이다. 마치 그리스도가 신의 표지인것 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표지이며 공현이다. 구교회관이 교회의 신성을 일방적으로 강조하여 교회를 그리스도 및 신과 동일시 절대시 한데 반하여 신교회관은 그동안 망각되었던 교회의 인간성, 나약성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따라서 교회는 오류와 범죄의 흔적을 씻기위하여 항상 개혁되어야 하며 결코 신과 동일시하거나 자신을 절대화 할 수 없음을 역설한다.『하느님은 언제나 인간의 범주를 초월하는 분』이시며 교회는 자신을 하느님과 동일시하기를 거부하고 교회를 초월하는 하느님에게로 인류를 인도코자 할 때에 비로소 교회의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어느 특정한 문화형태 철학 신학의 체계 인물 등을 절대화함이 없이 인간적인 모든 것을「가톨릭적으로」(보편적으로) 포용하게 되며 유한한 것을 절대화하는 우상숭배의 이단을 물리칠 수 있다. 따라서 교회의 중심은 교회자체가 아닌 신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진다.
넷째로 자기중심주의에서 신중심주의로 본연의 모습을 회복한 교회는 집단적 이기주의를 벗어나 자기봉사 자기 신장이 아닌 인류에의 봉사로 활동의 목표를 바꾼다 모든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기적인데 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현대 신교 신학자로 빈손, 본회퍼같은 이들의 말대로『본질적으로 이타적인 인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표지로 자처하는 교회, 또한 전인류에 대한 봉사에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올바른 질문은『이 학교 병원 등이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아니고『이 학교 병원 등은 이 지역 이 사회 이 국가 나가서 전 인류를 위하여 무엇을 하고있는가?』하는 것이다. 자기봉사에서 인류봉사에로의 방향전환은 교회의 전교사업에도 적용된다. 집단적 이기주의에 빠져 교세의확장에 집념한 나머지 강제적 종교교육을 시행할 것이 아니라 교회는 하느님이 이미 내면적으로 인간의 영혼 속에서 하시고 계신 사업을 외부에서 지시하는 표지로서의 사명에 충실하면 되고 인간의 내면적 독립성을 위협하는 여하한 강제행위도 삼가지 않으면 아니된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신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에 달린것 이고 인간이 결국 신의 은총을 수락하느냐 또는 거부하느냐 하는 것은 교회가 통제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개종자의 수가 늘었다고 또는 줄었다고 교회는 자만이나 절망에 빠질 수가 없으며 오직 표지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한 다음『우리는 쓸모 없는 종들입니다』하는 겸허의 자세를 취할 수 있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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