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란서 수녀가 들어와 조선인 지원자를 모집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안그래도 「천사같은 수녀」를 선망에 찬눈으로 쳐다보던 신자집 딸애들 가슴은 한껏 부풀었다.
흰수건에 까만수녀복, 걸음을 옮길때마다 짤그락 소리를 내며 보기좋게 흔들리는 허리에 찬 묵주, 일요일 종현(명동)성당 앞자리에 다소곳히 머리숙여 기도드리는 수녀들 모습, 그것은 어쩌면 말로만 들어온 천사의 모습이었으며 더욱이 종교적 분위기속에서 자란 신자집 딸애들에겐 「아름답고 고상한 삶」의 한 이상처럼 보일수 밖에 없었다.
1888년 7월29일 네 소녀가 첫지원자로 수녀원에 입회한후 곳곳에서 처녀들이 본당신부를 찾아 수줍은 표정으로 수녀원 입회를 교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쇄도하는 지원자들을 다 받아들일 수는 없는 형편이고 보니 안타까운 일.
신학교 보내는 일도 그러했듯이 이때 본당 신부들은 지원자 선발의 첫시험관이면서 추천권을 갖고 있었다.
우선 신덕과 품행 건강이 좋아야 한다. 일단 여기에 합격하고 나도 추천까지는 또 기약없는 날을 기다려야 했다.
1925년 「성분도 포교 수녀회」가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명동의 「살뜨르 성바오로 수녀회」는 유일한 수녀원이었으므로 지금같은 선택의 자유도 없었다.
본당 신부들은 지원자가 오면 선뜻 추천서를 써주는 것이 아니라 오랜시간을 끌면서 지원자의 성소(聖召) 여부를 관찰한다.
때로는 2년 또는 3년을 일편단심으로 기다리는 동안 신부는 이따금 고해소에서 넌줏히 묻는다. 『지금도 수녀원에 갈 마음이 있느냐』고. 일부 잊은척 내버려두다, 가끔 이런 질문을 통해 결의를 재삼 확인한후 「성소가 있다」는 판단이 서면 그때야 비로소 수녀원에 품신서를 띄운다.
그리고 얼마나 가다리느라면 어느날 본당 신부를 통해 아무날 아무시에 수녀원으로 들어오라는 통지서와 함께 「읏표」가 전달된다.
이 「읏표」를 받는 날부터 집안은 마치 혼례날짜 받은 것처럼 붐비기 시작한다. 「읏표」는 수녀원에 들어가 사용할 생활 필수품을 적은것.
「읏표」에 따라 우선 덮고 잘 침구를 비롯 봄겨울에 입을 치마 저고리 두루막 내의는 적어도 맞벌을 이밖에 버선 앞치마 홋이불 구두 식기 우산 세면도구 등 혼수감작만을 방불케하는 준비가 시작된다. 단 한가지 「거울」만은 준비물에서 제외된다.
어떤 집에선 먼저 들어간 사람에게 물어 미리 한가지씩 준비해 놓았다 꾸러 보내기도 했지만 대부분 가난한 신자 집인지라 한동안 복새를 떨며 준비해도 집안형편에 따라선 옷가지 몇벌이 고작인 지원자도 없지 않았다.
이리하여 「수녀원에 시집가는 날」 다시는 되돌릴수 없는 육친의 따뜻한 정과의 이별에 눈물을 흘리며 선배수녀나 아버지 또는 오빠손에 이끌려 수녀원으로 떠난다. 『명동수녀원에 도착해서 수속을 받고 지금은 없어진 본관에서 수련원으로 가는 구름다리를 건널때 이제는 내 평생을 바치고 죽을 집에 왔구나 하는 생각뿐입니다. 나간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요 』
열여덟 나던 해인 1914년에 들어와 지금은 고령으로 은퇴한 어느 노수녀의 회고.
이렇게 한 해에 20~30명씩 들어온 지원자들은 그로부터 2~3년간은 수도복 없이 흰저고리에 검정치마 차림으로 수련에 들어간다.
수련기간중 외출은 없고 다만 주일날 명동성당으로 미사참예 오가는 것과 1년에 한번있는 성체거동때 명동구내를 한바퀴 도는 것이 세상 바람을 쏘이는 유일한 기회였다. 한때 정해진 수업시간외 예비수녀들이 하는 일 가운에 가장 큰 일은 신학생들 뒷치닥거리.
용산신학교에서 바리로 실어온 바지저고리 버선 수십벌을 빨아 대리고 해진 곳은 일일이 꿰매는외 여름방학때면 이부자리 수십채를 팔아 다시꾸미고 겨울옷 짓느라 자기옷 지을새도 없었다.
그래도 힘든줄 몰랐고 순명으로 그렇게 해야하는 줄만 알았고 1차대전이 터지고 식생활이 어려운때 누구 하나 배고프다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고 지냈으니 요즘 수녀원 생활과는 거리가 먼 셈이다.
평복으로 수련기가 끝나면 그때야 수도복을 입고 작은 수건을 쓰게되고 이러고 3년을 더 지나야 비로소 착복식을 하게된다.
1919년 전까지는 수녀원 성당에서 착복식을 거행하다 그 후 명동대성당에서 화려하게 거행됐는데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성당안이 꽉차도록 구경군이 몰려와 희한한 예식을 호기심에 가득찬 눈으로 쳐다보았다. 흰치마 저고리에 길다란 면사포를 내려쓰고 머리엔 흰꽃화관을 얹고 옥색띠에 길게 딴 머리에 빨간댕기를 드리운 모습은 마치 「하늘의 선녀」같을수 밖에 없었다.
1915년 경까지는 옥색띠 대신에 노리개와 은장도를 착용하기도 했다. 착복식을 거쳐야 검은수도복에 큰수건을 받고 허리에 한가닥짜리 목주를달게된다. (종신허원후 부터는 두가닥) 이때부터 외출이 허락되고 지방으로 소임을 맡아 파견되는 등 수녀로서 대접을 받는다.
외출은 꼭 둘이상 짝지어서야 내보내는데 사방을 휘둘러 본다든가 뒤돌아 본다던가 뛰는 것은 일체 금물. 혹 어디가서 무심결에 거울에 자신의 모습이 비추기라도 하는날엔 무슨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전전긍긍했다.
살뜨르 성바오로 수녀회가 거울 사용을 허락한 것은 1967년부터, 칠순의 한 수녀는 거울도 마음대로 보고 바쁠 때는 뛰기도 하는 요즘 수녀생활은 옛날에 비하면 『선머슴된 기분』이라면서 한바탕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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