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천년동안 유교는 중국인의 생활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많은 중국인 학자들도 이 유교지식을 거쳐서 신앙을 찾은 것이다.
이러한 학자 중의 한사람인 베네딕또회의 故 루쳉창 원장은『유교는 그리스도와 가톨릭교회의 존재와 생활에서 그것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인간적인 것과 불멸하는 것-의 가장 분명한 타당성을 발견한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대북대교구의 주간지「크리스찬 라이프」에 실은 기사에서 경험 많은 평신자 교리교사 우 이첸씨는 중국인을 상대로 사도직을 수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유교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한 유교의 지식이 중국의 문화유산과 기독교 신앙과의 혼합을 가능케도 해준다고 말했다. 유교의 가르침은 또한 중국의 영향을 받은 동부아시아, 즉 한국ㆍ일본ㆍ월남민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故 고딘디엠 월남대통령이 1960년에 대만을 방문했을 때 그는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은 국가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평범한 공자의 유산(유교사상)이 공산주의에 대적하는 성벽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중국의 공산주의 형태에서 통치자의 존경, 정치지도자의 독재성, 그리고 공동책임조직 등 유교적 조직의 유물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은 이미 공식적으로 고대의 가르침을 페기했지만 현재 대만과 홍콩에 있는 대학교에는 현대적인 새로운 유교 즉 유교적인 인문주의를 발전시키고 권장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서구의 영향을 받은 과학적인 인문주의 사상가들은 이에 반대하고 있지만 프랑스의 장 르페브르 예수회 신부에 의하면 표면상 고래의 전통을 내던진 이들도 역시 유교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공자는 도대체 어떠한 인물인가?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현「샨뚱」성의「루」라는 소읍에서 태어났다 성은 쿵(孔의 中國音)이었는데 공자라는 말은 현자 쿵이라는 뜻이다.
그가 태어난 당시의 중국은 부패한 다수의 군소봉건군주국이 갈라져서 끊임없이 으르렁 거리고 있었고 또 사방으로부터 야만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공자는 국가를 개혁하고 평화를 되찾는 길은 고대의 현정자 및 선정자시대의「덕」으로 돌아감에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인간이 덕을 실천하고 통치자가 착한 생활로 모범을 보이고 사회의 인간관계에 질서가 잡히고 인간이 서로를 존중하게 되면 완벽한 국가건설도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그는 사회속의 인간복지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분야를자 기의 본령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의 생각을 들어주고 실천해줄 통치자를 찾아헤맸다. 그러나「루」에서 관리생활을 할 때와는 달리 그의 생전에 그의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공자가 죽은지 3백여년이나 지난 기원전 2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유교가 국가의 원리로 선포되고 德과 仁과 知를 강조한 그의 인문주의도 다른 미신적인 신비주의신조를 누르고 빛을 발하게 되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공자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와 1세기후에 태어난 맹자의 기록으로 전해진 것이다. (공자는 당대의 정치가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게 되자 제자들을 모아 교훈했던 것이다.) 공자는 끊임없이 仁의 덕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것은 상냥함, 너그러움 동정 인애 등으로 번역되지만 적절한 말은 없다. 그것은 군자(君子)의 마-크였으며 공자의 이상이기도 했다. 유교적 군자는 점잖으면서도 엄격하고 윗사람에게 예의바르고 아랫사람에게 너그럽고 항상 침착하고 매사에 중용을 지켜야한다.『네가 원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말라』는 유교적 중용은 인간의 성선설(性善說)을 믿은 그의 금과옥조라 생각된다. 중국에 가톨릭선교를 재개한 마테오 릿치 신부와 17세기의 예수회 신부들은 유교의 古典에 조예가 깊어서 중국인에게 익숙한 그들의 사고형태(思考形態)를 통해서 하느님과 그 메시지를 소개하고자 했다. 릿치 신부는 입교한 중국인들에게 관례의 공자공경을 허락하고 조상숭배예식(제사 등)을 보존하도록 하려했다. 이것이 중국교회에서 1세기 이상이나 말썽을 빚은 유명한 의식논쟁의 쟁점이 되었다. 이 사건은 결국 교황청이 릿치 신부의 반대편을 옹호함으로써 끝장이 났다.
오늘날 공자공경 예식은 종교적인 성격을 띤 것이 아니라는 인정을 받았고 가톨릭도 조상의 위패를 모실 수 있게 됐다. 또한 현재 대만의 선교사들은 중국인의 지배적인 윤리관이 유교적이라는 것을 다같이 인정하고 있다.
아직도 대학생들은 현대의 실존주의나 기타철학에 별 관심이 없다. 르페브르 신부가 지적했듯이 이들은 유교전통에 너무나 깊이 뿌리박혀서 이러한 반응 또한 유교적이라 할 수 밖에 없다.【대북ㆍ대만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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