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르15.34).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면서 자신을 그분의 아들로 인식하고 처신하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상 죽음의 고통 속에서 외친 절규이다. 에집트의 억압 속에 살던 이스라엘의 고통을 『똑똑히 보았고 괴로와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고』(출애 3.7) 이스라엘에게 자주 대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던 하느님은 당신 아들의 하소연에 들은 체 하지 않고 입을 다무셨다. 이스라엘을 향해 열려져있던 하느님의 입이 십자가상 아들 앞에서 굳게 닫혀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침묵 속에서 부재(不在)중에 죽어야했다. 아버지의 부재와 침묵 중에 아들이 겪었던 죽음은 하느님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느님의 고통
침묵이 간혹 교류 거부 또는 대화회피로 이용되지만 때로는 말없는 성실한 행동, 자기변화의 포기, 고통의 인내로운 감수, 적극적 동참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침묵은 설득력 있는 웅변 이상이 된다. 아들은 아버지의 묵묵부답을 견디면서 고통과 죽음을 감수하였고 아버지는 아들의 고통과 죽음을 침묵 속에서 받아들였다. 희생 제물로 사악이『아버지』하고 불렀을 때에 아버지는 미어지는 마음의 고통을 참으면서『얘야 내가듣고 있다』(창세22.7)하고 응답하였다. 아브라함은 희생되어야 할 아들 이사악보다 앞서서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 아버지도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겪어야 했던 아들보다도 먼저 더 큰 고통을 겪지 않았을까? 고통을 겪고 있는 아들의 처지를 대신 자신이 겪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아들을 구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출해내지 못하는 아버지의 처지는 아들의 입장보다 더 고통스럽다.
하느님은 십자가상 아들의 절규를 침묵 속에서 듣고 계셨다. 하느님의 침묵은 아들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초연해 있음을 의미하지 않고 그 고통 속에 함께 계시고 적극 참여하고 있음을 뜻한다. 고통이 절정에 이르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침묵뿐이다. 고통 받을 수 없는 하느님이 아들의 고통에 동참함으로써 고통 한가운데에 들어오셨다. 본성상 고통을 겪을 수 없는 하느님이 고통을 수락하신 것은 인간의 머리로써 헤아리기 힘든 하느님의 자기제한이다. 당신 자신으로부터의 이탈이다. 이 자기제한과 이탈은 하느님의 완전한 자유를 보여준다. 참 자유를 누리는 자만이 상대방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줄 만큼 자신으로부터 자유롭다. 따라서 고통을 즐겨서가 아니라 고통까지도 수락할 만큼 지고한 사랑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느님은 자발적으로 고통을 받아들이셨다. 사랑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자신을 양도하기 위해서 자신을 제한하고 열며 자신으로부터 이탈해야 한다. 이 자기제한·개방·이탈은 고통을 수반한다. 하느님의 고통은 인간 사랑의 그와 같은 과정에 따라 인간을 사랑하심을 뜻한다. 사랑을 위하여 고통을 기꺼이 수락하신 하느님만이 고통중의 모든 인간을 위로할 수 있다.
하느님의 자아봉헌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의 희생을 요구하였지만 이는 순종과 시련을 통하여 그의 신앙을 돈독히 해주기 위한 것이었고 결국은 희생을 만류하셨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말라. 나는 네가 얼마나 나를 존경하는지 알았다』(창세22.12). 하느님은 인간 아들이 희생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신다. 인간의 봉헌물을 손수 마련해 주신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이 마련해 주신 번제물 숫양을 잡아 아들 대신 바쳤다(창세22.14). 하느님이『마지막 시대』인간을 위하여 손수 마련해 주신 희생물은 곡식이나 짐승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아들이다. 단지 아들만을 인간에게 내어주신 것이 아니라 아들의 십자가상 고통에 적극 동참함으로써 당신 자신까지 양도하신다(로마8.32).
하느님은 아들뿐 아니라 당신의 영까지도 주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루가11.13). 아들과 성령의 내어주심은 하느님 자신의 양도이다.
사랑 때문에 당신을 낮추고 제한하셔서 인간을 몸소 찾아오신 하느님은 아들의 십자가 사건 안에서 인간을 만나고 당신을 그에게 양노하는 최선의 방도를 마련하셨다. 이제 하늘은 열렸고 하느님은 고통 속에서까지도 인간과 함께 계시는 아버지가 되셨다. 하느님의 온전하고 참다운 모습은 십자가 사건으로써 결정적으로 드러난다. 하느님이 외아들을 희생제물이 되게 하여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하려고 하신 사실에서 그분의 선과 사랑과 자유가 드러난다. (요한3.16~18:로마3.25~26). 이제 세상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신 하느님은 진노도 원망도 모르신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으로 하여금 당신과 화해하시고 인간들의 죄과를 묻지 않으시며 도리어 화해의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 주셨다(2고린5.19).
연약한 하느님
사랑은 그 자체 안에 강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약한 면모를 드러낸다. 이 약함은 상대방을 위한 온유함이고 침착성이다. 강하신 하느님은 약자를 찾으시며 이 때문에 연약해지신다. 보잘것없는 사람들, 뒷전으로 밀려난 사람들, 길 잃고 헤매는 사람,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더 정이 가시는 것이 하느님의 마음이다. 『측은히 여기는 마음』(루가7.13:마르1.40:6,34)때문에 하느님은 연약하시다. 십자가 사건 때에 하느님의 연약하심은 절정에 이르렀다. 죄와 불의와 거짓이 십자가 아래에서 승리의 축배를 들고 있을 동안에 하느님은 죄악에 패배 당하시는 것처럼 연약하셨다.
그러나 사랑은 연약한 모습을 통하여 자기 힘을 전해준다. 사랑은 연약해 보이지만 침착성으로 말미암아 결코 동요되지 않는다. 침착성은 사랑의 내적 힘이다.
하느님에게는 압도될 수 없는 깊은 침착성이 내재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온갖 고통을 성한 것으로 용납하고 흡수하며 심지어 변화시켜 줄 수 있다. 침착성은 고통들을 몸소 맡아지고 그것들에 의해 쓰러지지 않는 힘과 능력을 구비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하느님은 전통 신학의 개념에 따르면 불변하며『무감각적』이시다. 이 침착성은 고통에 대한 무감각이나 무관심과 전혀 무관하다. 하느님의 태연함보다 더욱 특징적인 것은 그분의 사랑과 동참과 관심이다. 하느님의 침묵은 침착성과 애정 어린 관심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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