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공통된 책임은 제2차 바티깐 공의회에 의하면 공동임책의 성격을 띤 각종의 위원회(본당ㆍ교구ㆍ신도협의회)에서 그리고 새 교회법에 의하면 신도가 참여하는 시노드에서도 표명되어야 한다.
물론 공의회는 성직자와 신도사이에 성서적 근거가 있는 차이점을 없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모든 이에게 공통된 책임 안에서 새롭게 확실한 윤곽으로 구별지우고 있는데, 이것 역시 친교 교회론에 속한다. 세례 받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사제직과 봉사의 특수사제직의 구별(정의 문제)은 고수되어온 셈이다.
이런 정식화된 표현은 그 말의 스콜라적 개념 때문에 많은 이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해하게 된다. 실은 이런 것이다. 즉 특수사제직은 공통사제직의 정도를 좀 더 높인 것이거나 그것의 집약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성직자는 더 좋은 그리고 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어야 할 것이다. 사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공통 사제직과 특수사제직의 구별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수준에 기인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친교 내에서 구별되는 역할과 사명에 기인한 것이다.
공의회는 의식적으로 신도에 대한 신학적 정의를 내리지 않고 유형적 묘사만 한다. 거기에 신도는 서품된 신분에 속하지 않는 하느님백성의 지체라고 되어있다. 이러한『-이 아니다』라는 부정적 묘사가 이제 적극적 방향목표를 표시해준다. 즉 세상 안에 산다는 특성이 신도에게 특별한 양식으로 고유성을 띤다. 신도들은 가정과 사회생활이란 통상적 조건에 살면서 세상 안에서 그들의 그리스도교적 사명을 실천한다.
그들은 세상의 그리스도인이요 세상의 신도이다. 물론 성직자와 수도자도 세상에 살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그리스도교적 사명은 직접 세속적 관계를 형성하는 가운데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그들의 특수과제 때문에 세속적 문제에 대해서는 뒤로 물러서는 것이 마땅하다. 공의회는 중세적 많은 발언과는 달리 신도들이 세상에 사는 것은 인간적 유약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수 사명에 의한 것이라고 밝힌다. 그러므로 신도의 임무는 현세적 사항들을 관리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정리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데 있다. 이는 복음정신을 따라서 누룩과 같이 어느 정도 내부로부터 세상구원에 이바지하기 위함이다. 목자는 신도에게 그가 세상에서 봉사하기 위한「빛과 힘」을 공급해줄 것이다. 그러나 후견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자유를 존중하고 그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입장에서 그런 일을 해야 한다. 여기에 신도가 목자로부터 존경을 받을 고유한 임무가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에 공동으로 참여하는 가운데 구별되는 소명과 역할이 있다. 이 상위성에 신도에게 고유한 특수소명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신도에게 특수한 소명과 역할중의 직무는 그들 위에 좌정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에게 봉사함으로써 관계를 갖는다. 달리 신도사이에 동반자적 관계가 성립되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목자는 그에게 신뢰를 가지고 있는 신도들과의 형제적 관계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목자들에게 신도들의 정당한 권한에 의한 것들을 정중히 들어줄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상이 친교 교회론과 공동책임에 관한 기본적 가르침이다. 그러나 아직 어디서나 현실화되지는 못하고 있다.
세 가지 현실적 문제
교회와 세상 안에서의 신도의 위치에 관한 토의는 물론 공의회로서 종식된 것은 아니다 또 한편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신학적 발전도 최근 20년간 매우 급속히 진전된 것도 사실이다.
서구사회에 있어서는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기 영역의 민주화 요구와 연결되어 세속화 및 해방운동의 새 바람이 불었다. 이로 인하여 교회의 직무이해 상에 일어난 위기는 한편으로는 사제와 신도의 평준화로 치닫는가 하면 또 다른 편에서는 이에 반발하여 양자에게 공통된 것, 관련된 것도 무시하면서 차등을 엄격히 두는 사례도 생겼다. 그리하여 세상에의 봉사는 신도에게, 구원봉사는 사제에게라는 배타적 영역이 구분된 것이다. 이와 같은 전제하에서 교회의 고유한 구원봉사에 신도가 참여한다는 것은 신도의 새로운 교회직무의 형식으로만 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성직자의 신도화 경향에 대응하여 신도의 성직자화가 생기게 된 것이다.
어떤 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신학의 내적 근거만가지고도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그 해결이란 공의회의 관련발언들을 차치하고, 성직자와 신도의 구별을 카리스마와 직무의 다양성을 살리기 위하여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 새 문제들을 공의회의 발언을 더 깊이 받아들임으로써 해결을 시도해 보고자 한다.
먼저 구원봉사와 세상봉사와의 관계를 물어본다. 이 물음의 배경에는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를 물어본다. 이 물음의 배경에는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해서 교회와 현대세계와의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여기에 현 교회가 안고 있는 가장 어려운 갈등과 위기의 문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미 공의회 이전부터 신학은 교회와 세상, 자연과 은총의 관계를 신스콜라식으로, 이원적으로, 순수 외적인 것으로 규정하여 견디어왔다. 공의회는 이 신학적 견해를 신도사도직에 관한 교령에서 거론하면서 하느님의 계획은 다만 하나 있을 뿐이며, 그것은 창조와 구원을 포함한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세상은 은총질서에 속해있으며, 구원과 은총의 메시지는 세상에 대해서 그 어떤 외적인 것이 아니며, 마치 2차적인 것이거나 다만 외적으로만 한층 더 올려놓은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세상은 이 메시지의 가장 내적 목적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상응하여 교회는 인간의 역사와 가장 깊이 얽혀져있으며 그것은 세상에 있는 교회, 세상을 위한 교회이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현대세계의 사목헌장).
이런 맥락에서 우리 문제의 결론으로 나오는 것은 세상 안에 있는 신도의 봉사는 순 세속적 봉사가 아니라 구원봉사이며, 동시에 교회를 위한 봉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 본질상 세상에 있는 교회이며, 세상을 위한 교회이기에 신도의 세상봉사는 동시에 교회적 차원을 가지는 까닭이다. 이런 봉사를 통하여 신도들은 세상의 정신적 문화적 풍요에서 오는 문제들과 난관들, 또 역시 체험과 견해들을 교회 안에 가지고 와서 교회를 풍요롭게 만드는데 공헌한다. 신도들은 말하자면 교회 안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신도들은 또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와 구원실현을 세상에 가지고 가서 거기에 작용케 해야 한다.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와 문화가 서로 영향을 주며, 동시에 사회에 그리스도교의 육화(肉化)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신도의 세상봉사는 교회-구원의 전적(全的)보편적 성사, 메시아의 민족으로 본 교회-의 특성,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은총의 보이는 표지로서의 특성의 한 몫을 차지한다.
이와 같이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 내에서의 신도의 위치가 결정됨에 따라서 제2의 사항으로서, 좀 더 교회 내부적 문제가 되는 교회 내의 신도의 새 직무에 관해서도 해답을 얻게 된다. 위의 말에서 귀결되는 가장 중요한 결론은 신도의 사명문제를 신도의 새 직무문제 내지 교회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신도에게까지 결부시킬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오늘날 교회의 사목적 임무완수에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신도의 첫째 과업은 결혼ㆍ가정ㆍ일ㆍ직업ㆍ과학ㆍ경제ㆍ문화ㆍ정치 등의 영역에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요즘 새 형태의 세상도피가 있는데 그것은 특히 신도의 과업을 교회내의 영역으로 옮기고자 함이다.
하지만 어떠한 단순 도식화도 하느님의 영에는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교회탄생 때와 같이 많은 신도들이 엄격한 의미와 교회영역에서 적극적으로 협력 하고 특별한 임무(교회의 공식적으로 위임에 규정된 신도가 할 수 있는 사목상의 봉사직을 해낼 용의가 있는 것은 현대교회에 나타난 즐거운 표지임에 틀림없다. 교회는 이 같은 새로운 발전에 대응하여 공의회의 의향을 따라서 나온 새 교회법에서 신품성사로 수여된 부제ㆍ사제`주교 그리고 신도의 사목적 직무를 포함한 직책의 개념을 구상했다. (교회법145).
시종직자ㆍ독서직자ㆍ영성체보조자ㆍ해설자(기도 선도자)ㆍ성가선창자 등의 전례봉사는 그러한 신도직무에 속한다.
말씀의 선포를 위임받은 봉사 중에는, 선교하는 교회에서 중요한 몫을 하는 교리 선생이 있는데 이를 우리는 교리교사ㆍ선교담당교사라고 한다. 동일어권의 나라에는 이외에도 신도공동체의 보조자·사목의 보조자ㆍ까리따스와 리아코니아 봉사의 보조자 등을 들 수 있다. 다른 영역교회에는 작은 공동체 지도직, 즉 사제가 없는 곳에서 말씀의 전례 내지 주일예배를 위한 봉사직, 그리고 사제가 없는 교회의 책임자의 직이 있다. 최근에는 자이레에서 모캄비(Mokambi)의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끝으로 사도적 활동과 새 영성운동을 책임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덧붙인다.
이런 새 직무의 발전은 매우 유동적이며 지방여건에 따라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새 직무에 있어서 우리가 취급하는 것은 신도의 직무인데 이것은 세례와 견진성사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신품성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기본원리이다.
신도의 새 직무는 사제의 부족을 메꾸기 위함도 아니요 사제와 경쟁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사제의 수가 적기 때문에 세워진 필요악도 아니다. 오히려 교회의 직무를 돕는 적극적 공헌이며, 그것을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봉사와 구원봉사가 서로 배타적 영역이 아니라는 표지이기도 하다. 신도의 새 직무로 인하여 교회의 사목활동은『좀 더 세상에 접한 것』이 될 것이다. 교회는 그야말로 세분화된 오늘의 세상에서 행하는 교회의 사목영역에 있어서 신도의 세상경험을 필요로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서 시대에 맞는 힘찬 방법으로 복음화를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반면에 세상생활에 젖어 있고, 그 생활에 개성적으로 종사하고 있는 신도의 입장에서는 사제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좀 더 효과적 복음증거를 위한 봉사를 향한 이런 상호협력은 현대교회의 또 다른 현상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니 그것은 재속회이다. 이 회원들은 수도자와 똑같이 복음적 권고를 따라서 생활화 하되 그 생활을 세상 안에서 세상의 직업에 종사하는 가운데 한다. 수도생활과 세상생활이 여기서 새로운 종합을 이룬다.
그렇지만 여기서 복음적 권고생활의 신분과 신도의 신분과의 구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위에 언급한 새 교회법에 의거해서 고안된 새 직무의 경우 이것은 또 다른 양식의 교량이 놓여진 셈이라 하겠다. 이 새 직무를 통하여 성직자와 신도사이에 각별히 친밀한 협력이 이루어지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로 인하여 새 직무자가 성직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새 직무자의 성직자화는 소용이 없는 것이며 오히려 그 자체의 독자성과 특수한 측면을 빼앗기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런 일은 눈앞의 이익만 보고 장기적 발전을 저해하는 일이 될 것이다. 새 술을 헌 부대에 담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롭게 그리고 인내롭게 새 발전을 육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난 공의회에서 나온 제3의 문제영역인「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대해서 말해보자. 자명한 일이지만, 이제까지 그리스도인ㆍ세례자ㆍ신도에 대해서 말하고 설명한 사항 안에 여성도 함께 생각된 것이다. 그럼에도 역시 여성과 그들의 과제에 대하여 명시적으로 언급해야함은 안 된 일이지만, 이런 일들이 그만큼 자명하지 못한 까닭이다. 이미 요한23세는 회칙「지상의 평화」에서 여성들이 공생활에 참여 하는 것은 시대의 표지라고 평가했다. 이 사회적의식의 변화는 확실히 오늘의 교회에 여러 가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공의회는 이 문제를 암시했을 뿐이었으나 그때부터 이 문제가 폭발력을 내포하고 있음이 드러났으며, 오늘날 그것은 가장 긴박한 사목적 문제점중의 하나로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솔직하게 위기적 징후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 문제를 신도로서의 여성의 위치에 국한해서 말하고자 한다. 따라서 우리 테마의 범위 밖의 문제, 여성의 사제 혹은 부제직 수여문제는 제외된다. 이런 것을 제외해도 문제는 참으로 방대하다. 첫째 문제는 교회에 있어서 여성들이 신도영역에서 남성과 정당하게 동등시되어야 할 뿐 아니라(오늘날 대체적으로 그렇다고 보이지만)실천적으로 같은 평가를 받고 있느냐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이든 똑같이 하자는 것은 아니다. 남성과 여성은 똑같지 않지만 가치에 있어서 그리고 신분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것이다. 이 동등한 가치의 상이성이 양성 간의 인력(引力)과 긴장의 근거가 된다. 이것이 여성과 남성 간의 동반자 관계를 맺게 한다.
남녀의 상보적(相補的)관계는 확실히 우선 결혼생활과 가정새활에서 중요하지만 직업생활과 교회생활에서도 그와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여성신도들이 교회의 성인교육ㆍ신학ㆍ교회관리나 까리따스 사업의 지도적 위치에서 대표역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신학적 혹은 교회법적 근거는 전혀 없다. 예컨대 어떤 부인이 교구청의 무슨 위원이나 까리따스 사업의 지도자 그리고 신학교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근거가 있는가? 이런 일이 이제까지 없다거나 아직 그리 흔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남성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일이다. 이것이 정의감의 부족ㆍ사랑의 부족 혹은 상상력의 부족현상이 아니겠는가! 불만족스런 상황은 교회를 상당히 해롭게 한다.
왜냐하면 여성들은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수경험과 많은 은총을 가지고 교회에 공헌할 수 있으며 이것은 교회를 풍요롭게 하고 이것이 없으면 교회가 빈약하게 되기 때문이다. 교회의 미래는 교회역사에서 드러난 다른 예를 보아서도 여성들이 공동 작업을 할 각오를 가지고 있느냐 그리고 교회는 여성들을 활동하게 할 각오를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에 달렸다.
신도의 영성
현대의 세 가지 문제영역에 관해서 논했으니 이제 사도직의 실천적 요청에 대해서 언급해 보겠다. 여기서는 좀 더 신학적 문제에 국한해서 취급한다. 따라서 신도들의 단체·연합·운동 혹은 가톨릭 액션 등의 사도직의 조직문제는 취급하지 않는다. 이런 조직화된 신도사도직은 나라마다 다르고 이 영역에서 모든 것을 강제적으로 또 인위적으로 통일케 할 이유는 없다. 조직문제보다는 신도의 영성과 교육문제가 더 중요하다. 이 두 가지는 신도사도직에 동기를 부여하며 서로 긴밀히 관련된 것이다.
교부들이 모든 신앙인의 사제적 봉사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 그들은 하느님과 이웃에게 봉사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희생제사로 본다. 이런 자아희생은 생명봉헌 즉 순교로써 완성된다. 세상의 많은 곳에서, 많은 지역교회에서 이것은 오늘날 다시 긴급한 것으로 되어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부들의 전통을 다음과 같이 종합한다. 즉 토마스는 세례와 견진에서 박혀진 인호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에의 참여로, 또한 예배에의 위탁으로 이해한다. 그는 여기서 예배를『그리스도교적 생활을 규정하는 의식을 따라서 하는 제사』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토마스에게는 외적 의식이 문제가 아니다.
즉 외적 기구가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규정하는 의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전체가 그러하듯이 신도들도 첫째로 힘쓸 일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고 생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도영성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되겠는가? 여기서 다만 불충분한 단편적 시사 몇 가지만 들겠다. 모든 그리스도교 영성에 인정되는 것은 신도영성에도 당연히 인정된다. 즉 개인적 기도ㆍ매일 새롭게 하는 개인적 회개ㆍ미사참례 등이 그것이다. 이런 것들은 독특한 양식으로 세상에 열려있는 영성이다. 이는 세상을 모방하는 영성이란 말은 아니다. 그 표어는「모든 것 안에 하느님을 발견함」이다. 즉 하느님의 훌륭한 선물을 즐거워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 장애자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중에 있고, 병중에 있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이며 그런 사람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를 만나주신다.(참조:마태25.31~46). 가난한 사람들과 박해받는 사람들과 연대의식을 갖는 것은 바로 오늘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에는 중요한 신호가 된다.
그 다음으로는 그리스도교적 자유의 정신이다. 그리스도인은 구원현실과 오늘의 온갖 긴장과 갈등 속에 있는 세상현실 사이의 위기적 교차점에 살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대화도 해야 하고, 신앙의 증거자도 되어야 하며 세상을 긍정하기도 하고, 십자가의 표지 안에서 세상을 역행하는 증인이 되어야 하는 그야말로 긴장의 한 가운데 살 것을 요구당하고 있다. 영(靈)을 올바르게 식별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여기서 안이한 자리는 모두 제쳐놓아야 하는 수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개인적 결단을 방해할 수는 없다. 그와는 반대로 교회 내에서는 이제까지보다 훨씬 더 관용과 존경을 베풀며 개인적 결단을 존중하는 아량이 있어야 하겠다. 그리스도인의 책임 있는 결단을 위해서 교회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도움은 적적한 신앙교육과 양심교육을 실시하는 것이겠다. 적지 않은 혼란, 또 신도의 지위에 관한 논란도 신앙사항에 대한 교육 부족에서 나온다. 성인교리교육의 쇄신을 위해서 중요한 전제의 하나이다. 그 다음으로 떼르뚤리안은『하나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말한바 있다. 그리스도인은 폭넓은「성인의 통공」안에서 항상 다른 그리스도인과 함께 산다. 통공(Communio)은 친교(Communicatio)를 의미한다. 이런 일은 그룹ㆍ친우의 모임ㆍ대화친구의 모임ㆍ단체연합회 등에서 다양하게 가능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세포는 아무래도 가정이다. 지금의 교회 내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영성운동과 소위 기초공동체이다. 이 양자는 교회의 희망을 나타낸다. 그 구체적 형태는 아직도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성령의 중대한 신호임에는 틀림없다. 그것들은 오늘날 신도사도직이 취하기 시작한 구체적 형태의 표시인 것이다.
기초공동체의 구체적 의의는 뻬루의 리마(Lima)를 둘러싼 방대한 슬럼(Slum)가에서 그리고 아프리카 7개국을 여행하는 중에 나에게 떠올랐다.
누가 이 기초공동체에서 혁명적 요인을 본다면 그는 이것을 완전히 오해하게 될 것이다. 기초공동체에서는 사제 없이 그리스도인들끼리 모인다. 그들은 거기서 성서의 하느님 말씀을 함께 읽고 자신들을 위해서 그것을 해설하고 함께 준비하고 교회생활에서 나오는 구체적 문제에 대해서 상담하고 결정하며 사회적 문제 또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문제를 의논하고 해결하기 위해서 모인다. 여기서 신도의 활동과 책임이 가장 인상 깊게 집중적으로 행사된다. 여기서 교회는 친교로서 새롭게 살아난다.
이런 형태를 구라파에 그대로 이식할 수 있다고 본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구라파는 젊은 교회에서 자극을 받되 그 나름대로 길을 찾아야 한다. 이 일은 다만 그리스도교의 뿌리를 재발견하고 다시 활성화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구라파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그리스ㆍ로마문화와 게르만·슬라브 문화가 융합된 종합을 통해서 크게 되었던 것이다. 이 종합이 근대의 세속화 빛 해방의 과정에서 붕괴되었다. 새 복음화와 새 회개가 없이 쇄신은 불가능하다. 새 문화와 그리스도교 정신을 융합하는 일은 첫째로 신도들이 할 일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특별한 양식으로 신도의 시기가 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단한 새 희망의 시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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